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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1일 목요일

미술시장 영향력 TOP 10 변호사들 / 10 of the Art World’s Most Powerful Lawyers

10 of the Art World’s Most Powerful Lawyers - They navigate an increasingly litigious art world.
Christian Viveros-Fauné, April 29, 2016 중 일부를 번역한 글(링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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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net News는 정보에 입각 한 목록에 오를 변호사 리스트를 꼽기 위해 익명을 희망하는 몇 명의 유명한 변호사에게 질의를 했습니다. 다음은 예술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변호사들입니다. (참고 : 알파벳순)

1. Jo Backer Laird (이력은 여기를 눌러 참조)
(사진출처는 상기 홈페이지)

 Patterson Belknap Webb & Tyler에서 Backer Laird는 Christie 's의 선임 부사장 겸 법률 고문으로 10 년을 재직했습니다. 그는 북미 및 남미 지역에서 회사 업무와 관련된 법적 문제를 담당했습니다.

현재 그의 회사는 피카소의 1 억 달러의 마리 테레스 그림을 둘러싼 분쟁에 개입하였고 2 월에, 분쟁 당사자들은 일시적 합의에 도달했습니다. 흉상은 MoMA가 Gagosian에게 배달되었습니다. MoMA는 최근 "Picasso Sculpture"전시회에 포함되었으며, 분쟁 해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2. 존 케이힐

Robert Lowinger, Renee Vara, John Cahill at Phillips Auction House. Courtesy Sean Zanni/PatrickMcMullan.com. 출처(새창)

Cahill Partners의 설립자 인 Cahill은 필립스 드 퓨리 앤 컴퍼니 (Phillips de Pury & Company)의 고문 변호사 겸 수석 부사장으로 30 년 가까이 경력을 쌓았고, 많은 유명 예술 관련 소송을 처리했습니다. 2008 년 그는 세 작품에 대한 664 만 달러의 지불로 소더비를 대신하여 할시 마이너를 상대로한 소송, 2012 년에는 사진 작가의 6 백만 달러 상당 작품에 대해서 크리스티가 새롭게 편집 한 사진을 판매하면서 조나단 소벨이 제기한 소송에서 Eggleston Artistic Trust를 대표했습니다.

최근 Cahill은 Ann Freedman, Michael Hammer, Glafira Rosales 및 Knoedler Gallery에 대한 소송에서 John Howard와 Martin 및 Sharleen Cohen을 대리했습니다. 그들의 사건은 Domenico DeSole이 같은 피고들에 대한 자신의 소송을 해결 한 지 3 일 후에 해결되었습니다.

3. Gregory A. Clarick

Clarick의 전문 분야는 복잡한 상업 소송 및 예술, 오락 및 지적 재산권 법에 관한 것이지만, 동료 변호사 인 Aaron Crowell 및 Emily Reisbaum과 함께 수석 변호인 인 Eleanor와 Domenico De Sole, 앤 프리드먼 (Ann Freedman)과 크노 들러 (Knoedler & Co.) 갤러리에서 2004 년 8 백 3 십만 달러짜리 로스코 (Rothko)를 사들였습니다. 공개되지 않은 합의금으로 소송외 절차에서 해결 된 이 사건은 Clarick과 그의 회사 인 Clarick, Gueron, Reisbaum LLP에 대한 승리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4. Thomas C. Danziger와 Charles T. Danziger
Thomas and Charles Danziger. Courtesy of photographer Kate Simon. (출처)

두 형제는 Danziger, Danziger & Muro, LLP의 창립 파트너이며 예술, 명품 브랜드 및 고급 레스토랑 그룹을 전문으로합니다. Van Cleef & Arpels, Cartier, Piaget, Montblanc, UNIQLO, Issey Miyake, David Bouley, Sugimoto Hiroshi, Mori Mariko 및 회사, 박물관, 예술가, 갤러리 및 수집가가 고객입니다.

두 형제는 artnet News와 Art + Auction Magazine에 대한 예술 법의 논란이 많은 측면을 광범위하게 기록했습니다.

5. 데이비드 바움
Betty Stolpen, David Baum at the Inaugural Whitney Collection Award in 2016. Courtesy of Patrick McMullan.com. (출처)

비얀 (Cy Twombly) 재단 사무 총장 겸 외부 고문 인 바움 (Baum)은 뛰어난 성과를 가진 변호사입니다. 2012 년 바움은 Roy Lichtenstein의 Girl in Mirror (1964)라는 그림의 "불법적 인"판매를 위해 비정규직 Jan Cowles를 대신하여 Gagosian을 고소했습니다. 이 사건은 공개되지 않은 합의금으로 마무리 지어졌습니다.

6. 아론 리차드 골룹
Aaron Richard Golub, Lisa Tan in 2007. Courtesy PatrickMcMullan.com. (출처)

예술 분야 법률이 Johnny Cochran의 전문분야입니다. Golub는 도널드 트럼프 (Donald Trump)를 대표하여 마틴 스콜세지 (Martin Scorsese)를 고소하고 고객 중 몇 명을 워홀의 공장 거주자로 간주했습니다. 저명한 변호사가되는 것 외에도 Golub는 베스트셀러 범죄 스릴러 인 The Big Cut을 썼으며 Edie Sedgwick에 관한 영화 인 "Factory Girl"을 제작했습니다.

Golub는 마이애미 부동산 개발 업체 인 Craig Robins를 대신하여 데이비드 즈위너 (David Gwner)를 고소한 적이 있습니다. (갤러리에 "블랙리스트"를 남기려했다고 주장했다.) 부인 트레이시 헤자일란 - 아몬 (Tracey Hejailan-Amon)이 ​​전 남편 모리스 아몬 (Maurice Amon) (그는 2 천 2 백만 달러에 달하는 예술품 수집품을 절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5 년에 영국 딜러 인 주디스 헤스 (Judith Hess)를 수백만 달러 모네 거래에 대한 미납 수수료로 소송을 수행한 적도 있습니다.

7. 랄프 레너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예술분야 변호사였던 레너 (Lerner)는 크고작은 횡령,사기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이러한 것이 발견되기 이전에, Lerner의 고객은 Gagosian, Sonnabend 부동산 및 대규모 수집가 Steven A. Cohen과 같은 미술 세계 거물들이었습니다. 그의 현재 웹 사이트에 따르면 레너 (Lerner)는 지난 1 년간 1 억 달러가 넘는 매출과 구매를 포함 해 미국 내 어느 누구보다 "공개 경매 판매 및 개인 거래가 지난 40 년간 많은 조언을했고 교섭했다"고 되어있습니다.

8. Jonathan A. Olsoff

Sotheby 's의 전세계 고문 변호사 겸 사무 총장 인 Olsoff는 2015 년 5 월에 세계 최대 소송 및 미국 고문 변호사로 20 년 만에 Tad Smith가 차용 한 CEO 인 Tad Smith에 의해 경매 회사의 최고 법률 사무관으로 승진되었습니다.

Sotheby 's에서 오랜 기간 근무하기 전에 Olsoff는 주요 기업 법률 회사 인 Skadden, Arps, Slate, Meagher & Flom에서 근무했으며 1989 년 Donald Wildmon 목사와 American Family Foundation에 대한 1989 년 소송에서 David Wojnarowicz를 대표했습니다. PPOW 갤러리는 형제인 Wendy Olsoff의 소유.

9. John Silberman
John Silberman, Elliott Carlen at the 2013 IFPDA Print Fair. Courtesy of Patrick McMullan. (출처)

제임스 터렐 (James Turrell)과 리차드 세라 (Richard Serra)를 대표하는 외에 실롬 맨 (Silberman)은 빌렘 드 쿠닝 (Willem de Kooning) 사무를 처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1989 년에 그는 예술가의 딸인 Lisa de Kooning과 예술가의 아들 인 John Eastman을 대표하여 De Kooning의 보좌관이되었습니다.

Silberman은 현재 Willem de Kooning Foundation의 회장으로 재직 중이며 De Kooning의 유산을 관리하는 주요 인물입니다. 그의 회사 인 John Silberman Associates PC는 1996 년에 설립되었으며 계약, 기업 문제, 저작권, 지적 재산권, 세금 및 부동산 계획 (유언 및 신탁 포함), 부동산 관리 및 비영리 단체 법률을 전문으로합니다.

10. E. Randol (Randy) Schoenberg

Schoenberg는 Maria Altmann, 비엔나의 National Belvedere Museum에서 5 개의 다른 Klimt 작품을 회수하기 위해 Klimt의 초상화 인 Adele Bloch Bauer I (1907)의 원래 소유주 인 Maria Altmann을 위해 일한 바 있습니다. 법률 전문가들은 그가 미국 내 외국 정부를 성공적으로 상대로 소송을 제기 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주니어 변호사는 Altmann의 주장을 대법원으로 가져 가서 결국 승소했습니다. 2006 년 마리아 알트만 (Maria Altmann)은 오스트리아 법정에서 작품의 소유권을 획득했습니다.

Ronald Lauder는 Adele Bloch-Bauer의 초상화를 사서 뉴욕의 Neue Galerie에 설치했습니다. 그는 이 승소 사건 이외에도 로스 앤젤레스의 홀로 코스트 박물관 (Museum of the Holocaust)의 회장을 역임했으며 수백만 달러를 기부했습니다.

* 이외에 정보원에 의해 제안 된  영향력 있는 예술분야 변호사들로는
- Amy Adler (NYU 법대)
- Daniel McClean (Howard, Kennedy, London)
- Daniel Weiner (Hughes, Hubbard & Reed)
- Luke Nikas (Boies, Schiller & Joshua Roth
- Steven Schindler
- Diana Wierbicki
-  Lawrick Herrick Feinstein LLP
- Donn Zaretsky John Silberman Associ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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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28일 일요일

한국 아트 마켓에 관한 단상

한국 아트 마켓에 관하여 막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이래로 세미나를 듣던 중 생각하던 것들을 적어 유진상 선생님께 메일을 드렸다. 막상 생각을 적다보니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이 더 들고 답장으로 추천해주신 아티클, 저서들을 읽으면서 동향을 팔로업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9.07.28. 4:13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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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27일 토요일

2000년대 : 미술현장으로서의 세계 (2부)


다시바로함께한국미술 공개세미나 V

2000년대 : 미술현장으로서의 세계

2019. 7. 27. 토 14:00-17:30
이음센터 이음홀(5F)
문화체육관광부예술경영지원센터 주관

1부 (클릭시 새창)
2부 (현재페이지)

(2:00-3:30 사이 앞부분 내용 본글에 포함되지 않음)


2부 라운드테이블



정현

미디어 비엔날레 에 관하여 질문최근에 보면 우리가 생각하던 그런 전형적인 미디어와는 사뭇 다르다 올해 들어서 인터넷 웹아트 탄생20주년 기념으로 해서 관련 전시가 많았는데그 얘기를 하면 어떨까 싶다디지털을 세계화에 접근할 수 있는 진입로로 삼은 것 같다

유진상

2000년대에 송미숙 선생이 미디어 시티에 전시를 했을 때 예산이 백억 넘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정부 지원을 받아서 그 큰 규모를 지원받아 열면서 김대중 정부의 IT 지원 정책 방향이었기 때문에 당시는 그렇게 되는게 당연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최근 미디어시티서울은 제가 한 다음 박창경 백지숙 그다음 컬렉티브로 이어졌는데나라 자체는 미디어 테크놀로지면에서 굉장히 앞선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 그것에 관심을 갖고 그 기술을 기반하여 창작을 하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적다상대적으로 일본의 경우 특유의 오타쿠 문화떄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오래전부터 일렉트릭 일렉트로닉 인포마티브 툴을 사용한 작업들이 굉장히 저변이 깊게 자리잡혀있다일본 문무성 홈페이지 보면 정부 문화정책을 시행할때 미디어를 떼어놓고 지원한다지원 규모가 크다는 것이다.

미디어시티 서울은 국내 유일하게 기술기반 예술을 부흥시키는 플랫폼이었고 거기에 우리 국내에 인터네셔널 비엔날레가 있는데광주비엔날레와 부산비엔날레는 같은 컨텐츠다 같은 네트워크 안의 큐레이터를 초빙해서 각국의 국가대표를 불러서 전시를 하는 그런 성질의 전시들이다국내 작가들의 경우는 광주에서 전시했다가 부산에 갔다가 하고 있다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그 자체만으로 굉장히 공급이 넘친다그런데 미디어시티마저도 똑같이 한다면 조그만 나라에서 같은걸 너무 많이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그래서 조금 다변화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가지고 미디어시티 서울은 출발점에 다뤘던 것 과 같이 기술기반 창작 이슈들을 전 사회적 전 시대적 차원에서 조망해보는 플랫폼이 되었으면 한다는 생각을 했다.

제 앞에 김선정씨가 했는데 그때 다시 소셜 이슈로 가서 일반 비엔날레처럼 되었길래 저는 다시 기술기반 전시로 돌아가자고 해서 소위 소셜미디어 관련한 전시를 만들었다그 다음해에 다시 소셜한 이슈의 비엔날레로 진행해서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거기에 대해서 제가 판단할 입장은 안되지만 조금 너무 집중되는 것이 좋지 않게 생각하는 입장이라서 다변화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정현

생태계에 관심을 많이 갖고 이야기를 하시는데 한국 미술계가90년대-2000년대 초반까지 모든 미술 잡지나 미술 정책이 전국의 균형발전이 빠진적이 없었다그런데도 불구하고 서울로 초 집중되는 현상은 마치 학벌 사회처럼 계속 반복되는 것 그런 풀리지 않는 괴리 같은것들이고 미술계에서도 여전히 비슷한 현상이 초래되는 것 같은데 선생님은 그렇다면 우리 같은 작가 큐레이터 비평가 교육자들이 실천해야하는 고민이 있다는 것인데 혹시2000년대 초반에 공장 예술제처럼 (그것들을 해결하기 위한그런 시도가 있는지 궁금하다


이주요

한쪽으로 집중된 활동이 그 요건이 무엇일까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질문이 있다.

유진상

저는 제가386-지금은586이 되었지만-세대이다저는 저희 세대가 문제인 것 같다한 세대 전체가 동일하게 경험한 기억을 가지고 그 세대가 지금 주류가 되었는데그러면 당연히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여러분은 그 물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한 세대 전체가 거의 백퍼센트 가까이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슈가 한군데로 모이는 것은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다만 그런데도 그게 하나의 국가사회이기 때문에 그 안에는 다른 것들을 빈공간으로 달려가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너무  모든 것들을 장악하려는 욕망은 이해하지만 빈공간을 고려해야한다그렇게 생각한다.

진행자(김장언) : 미디어시티 관련하여서 집중된 것들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다른 질문의 한 포인트는 세계화와 관련되어 미디어의 변형같은 것들이 어떤 여향을 미쳤느냐에 관한 질문이기도 했다소통이 매우 가벼워지고 세계를 경험하는 툴이 달라졌다

유진상

93년도부터 피시통신을 하고95년 인터넷, 96년에 개인용 휴대폰 보급2000년대 중반부터 고속 통신이 보급되었다. 7-8년 안되는 사이에 통신 환경 급격히 변했다모든 사람들이 거의 인터넷에 접속 되어있고 싸이월드 시대이니까자기 계정에 대한 관념이 확실히 정착되어가던 시기이다그래서 저는 그때 하던 이야기가 이제는 인간을 정의할 계정으로서의 인간이라는 개념도 말했다지금의 인스타그램페이스북이 다 그런 계정들이다

저는 crosstalk크로스토크라는 전시를2002년에 했는데 그 전시는 문화예술진흥원에서 저한테1200만원을 주면서 문화회관1,2,층을 전부 메우라고 했다예산이 적어 그 넓은 면적을 채우기 곤란했다그런데 그 전에 제가 인터넷으로 라디오방송하던 것을 본적이 있다그래서 인터넷으로 그 티비 방속국을 만들어볼까 했다별 생각없이 했다아는 사람에게 물어봤더니 그때 벤처를 하는 사람이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기술을 제공할 테니 그러면Video on demand를 제공하자고 하는 것이다그래서 학교에 있는 장비들을 다 들고 나와서 구석에다 방송국을 차렸다그래서 회선을 끌고와서 동시에300명정도 접속 가능한회선으로 온라인 비디오 스트리밍 방송국을 만들었다컨셉은 간단하다어차피 (날씨가 춥기도 하고아무도 안보러올테니 카메라를40대정도 전시해놓고24시간cctv처럼 보여주자는 거였다그래서 전시장에 카메라를 달고 작품들을 이수경도 참여하고 여러 작가들이 참여했었다.

퍼포먼스를 하고 그때 밤에 평론가드들을 불러서 술을 마시고 술마시는걸 생방송으로 방송을 했다그게 되게 재미있었는데 그게 제가 미디어아트 큐레이터가 된 계기다



이주요: 90년대 초반부터 변화되는게 작가로서 그런 커뮤니케이션의 디지털화로 인해서 어떤 변화를 경험하였는지처음에2학년때 뉴욕을 간 시절나는 뉴욕을 갔는데 파이낸스가 강세인 좋은 학교라 부자들이 많았다유학생들도 돈이 많았다그런데 그 친구들도 인터네셔널한 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그 당시에 국제전화는 빨리 하고 끊어야 하는 시기였다그들 중엔 결혼에 골인하는 일도 있었다

작가활동을 하면서 저는 특이하게도 인터네셔널 전시를 할 때에는 어시스턴트로 따라갔다.당시에 업무는 팩스로 주고받았다처음에는 큰 도화지로 그리고그 다음에 에이포 크기로 줄여서 복사하고 다시 팩스를 보내고 한 시절이었다.

시간이 아주 멀어보이지만 그렇지가 않다팩스자료들이 굉장히 많이 아직도 남아있다그것을 위한 드로잉복사물들이 많이 있었다그러던 시절이었다그리고 저는 이제 오히려 되게 많은 비행기를 탔다한달에 두번씩 젯셋이라는몸으로 했기 떄문에 오히려 그런 것들을 미디어 영향을 많이 안받은 채로 살았다멀리 스페인에 있는 잡지와 화상 인터뷰를 해서 작업을 퍼블리시 했다가 그 에디터와는 전혀 만나보지도 못한 식의 방식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앞으로 미디어라는 것이 결국엔 우리가 그렇게 미술 관에서 결국 관객을 만나게 하면서 그 브리지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지 않을까그 노력에 주요한 파트는 쉽게 해주는거다어려운 것을 단순하고 납작히 만들어서 하나의 언어로 만들거나 생활에서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예술은 근데 그렇게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그래서 그 이상한 방식으로 오해의 말을 흉내를 내면서 그게 대중화다이게 오디언스를 더 많이 모을 수 있다고 생각을 했던 시절이 간 것 같다이제는 대중ㅇ 직접 컨택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하고 말도 안되는 소리라도 직접 떠든다어떤 것이 형성되는 것인지가 분명하다저는 더이상 미술이 뭔가 되게 놀이로서도문화로서도 자리를 잡고말할거리어디로 가서 놀러가자예쁘게 사진찍어 올리자 하는 문화로서 향유되는 것 같다.

진행커뮤니케이션 툴이 핵심이 되었다.

이주요전시가 권력의 관계가 있다거기에 어우러지는게 힘들었고 그걸 해내기에는 힘이 없었다전시 혐오감도 있고책을 팔고 모든걸 쏟아붓고 다음날 오면 다시 설명해야한다.

오브제에 대한 이야기를 가르쳐야겠다이 친구들이 물건에 대해서 조각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물에 대해서 사물이 커뮤니케이션 하는 어떤 식으로든 발현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열심히 수업을 해도 이 친구들은 다음에 보면 버린다

저는3개의 스토리지를 빼라고 런던 독일 서울에서 연락이 와있는데그게 해결이 안되었다태어나긴 했으나 과감하게 버릴 수 없어 한곳에 모아놨는데 갤러리가 나이가 들어서 이제 버리거나 하는 식의 일들이 일어난다제가 거기에서 시장성있는 작가가 되면 되는데 그렇게 못했고저는 바디 있는 활동 하라는 말을 잘 못한다너 그림그리는거 잘하는데 그거해라비디오 잘하면 비디오 해라하고 말한다이 친구들이 이걸 해나가면서 살아갈 수 없는데 이게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좌절감이 있다.

전시하고 난 다음에 버렸다는 것계속 이동하면서 작업의 생산 방식들결과물로 작업화시키는 것에 대한 것을 비물질화 시키거나 개념적인 툴로서만 유통시키는 그런 현상들도 한편으로는 당시 한국 작가들에게 많이 보여줬던폐기해야만 지속이 되는 것..


기혜경

박이소 작가를 언급하셨는데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고동시대 미술계에 엄청난 영향 미친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주요 선생님이 어시로 활동하던 중 옆에서 본 바 어땠는지또 작업을 대하는 태도라든가 그 세계관이라든가 그런것들이 미술계에 그 이후에 영향을 많이 미쳤다고 생각을 했는데옆에서 지켜보신 바 어떠셨는지 궁금하다.

이주요

박이소 선생님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거 싫어했다박이소씨라고 하는걸 좋아했고애들 같은 장난 좋아한 분이다 미디어에 관심이 진짜 많았다끊임없이 컴퓨터 안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혼자 문닫고거기에 대해서 아주 어떤 통찰력을 갖고 있었던게 분명한 것 같다계속 삶을 이어서 사셨으면 어땠을까 하는 질문의 저는3년에 한번씩 떠올린다.

제가 그때 어렸지만개발도상국 이슈나 압축성장이슈 등을 계속 작가 스스로 묶이는 것이 너무 싫어했다내가 시멘트 쓰는 것만으로 (개도국성장이슈 프레임으로 해석하는데나한테 왜 그런걸 해석을 느냐 하는걸 불쾌해했고역사가 흘러가고 거기에 대한 것에 많은 의견이 있었던 것 같다제가 거기에 되게 비켜나면서 강력한 특징으로어떤 개성으로 혼자 어떤 존재로 만들어내는 것에 대해서 관심 많으셨고 서포트를 많이 해줬다그분 아니었으면 제가 이걸 계속해도 되는지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외따로 떨어진 행동을 하고 있었으니까근데 선생님은 그걸 굉장히 중요하다고 했었다.

스스로도 그러존재가 되고싶어하셨던 것 같다내가 작가가 되서 중요한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좋은 작품혁명같은 작품을 꿈꿨던 것 같다가끔 앉아서 그런 말씀 하셨다내가 앉아있으면 너무 아이디어가 안 떠오르는데 하루만 미친듯이 작업 아이디어가 생각났으면 좋겠다는 열망을 느껴하셨다.내가 작업을 해서 어떻게 되어야겠다하는 거 보다 기상천외하고 어떤 것과도 비교 안되는 작업을 하고 싶어하던 것 같다.

진행박이서선생님은80년대에 세계를 경험하면서80년대에 한국의 시간뉴욕의 시간 차를 보면서 이 차이들에 극복하거나 개선하기 위해서 계속 노력들을 해왔던그게 태평양을 건너서 전시되고 한국으로90년대 넘어와서도 광주비엔날레등에 지속적 관여하면서 본인이 그러한 작가로 표상되기 보다는 한국의 현대미술의 세계화의 지칭 속에서 보이지않는 역할을 많이 했다그렇다면 이제 플로어로 질문을 넘기기전에
세계화로 나가는 것은 커리어 빌드업으로 생각하는 것 같고 지금의 한국 현대미술의 세계화라는 것과 연관시켜 본다고 한다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유진상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다예술의 원칙은 각자가 자기가 이 세계의 중심이 되냐 아니냐의 문제다나머지는 어떻게 보면 그 조건들과 관련된 부분이다그러니까 이동이라고 하는 것은 이동은 비행기값도 싸고 많이 갈수 있다그런데 그 이동이 자기가 원하는 것인지 잘 와닿지 않을때도 있다그렇게 하지 않고도 이동할 방법도 생겼다한 장소에 있으면서 굉장히 많은 이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이 많이 생겼다나는 해외에 자주 갈일이 있는데 그런데 나가는 이유는 저같은 경우에는 너무 어렸을때부터 이동을 했었기 때문에 습관이 되서 그런거같다지금은 좀 피곤하고 지겨운데 가게 된다세계화라는 것도 개개인들에게 요구되는 개념이 아니고 정책을 하는 사람이나 비평을 하는 사람들이나 비평가들도 많이 이동을 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각자가 자기 있는 곳에서 중심이 되는 방법을 찾는 것그게 진짜 테크놀로지다자기 머릿속에서 알고리즘을 생각해낼 수 있으면 되는 거다.

정책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나라의 위상이나 미술계의 정량적인 지표라던가 미술계가 어떻게 되는지중국에 어마어마한 미술관이 텅텅 비었다 하는 말이 오가는데 저는 그런생각이 든다정책하는 사람들이 제일 필요한 건 콘텐츠다 그게 나오려면 작가가 있어야 하고,작가가 나오려면 작가가 개인이 되어야 하는데 개인이 되기 힘들면 작가가 될 수 없다

저는 누구든지 다 스스로 자기가 원하는게 뭔지 분명해지고 그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한다거기에 대해서 누구한테도 조언을 듣거나 설명을 들을 필요가 없다원하는게 분명하다면
그런식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삶을 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세계화가 되었는데 그 세계화의 목적은 이 세계에 그런식으로 살아온 개인들의 사례들이 참 많다는 것을 접하게되는 것이다더 많이그 정도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거꾸로 말하면 자기가 있는 곳에서 예외적이 되면 된다.

이주요정주하는 삶이 아닌 유목이다국제 활동은 모국이 아닌 다른 국가나 모국으로 이뤄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돈이 있으면 조각들은 커진다조각들이 커진다돈이 있는 신체들만 커진다

우리가 이 신체성을 버릴 것인가 질감스케일의 감각이 모든 것에서 느껴지던 것들을 버릴건가친구를 사귀지 않을 것인가친구도 몸이다그런데 나는 나가서 활동을 했을때 그 다른 신체들이 저를 다시 불러줬다친구가 되었고 이건 어찌할 것인가싶다.

진행세계화는 다양성의 확대이기도 한데세계화라는 논의가 이뤄졌을때 그건 환상이고 더 가속화된다는 말을 하는 학자들도 있다동질성이 승리하는 세계가 올 것이기도 하다.

플로어

플로어 토론 1. 선생님들의 문제의식은 뭔가?

유진상축구장에 빈 데를 뛰어다닌다문제가 많다고 했다저는 대학교수이기 때문에 학생들이 졸업하고 난 다음에 어떻게 될 것인가가 너무 걱정된다교육부에서 하도 취업률을 중시하니 수업을 제대로 할 수 없다그런데 그건 하나의 변명 거리고 저는 젊은 작가들이 어디까지 목표를 둬야하는지가 문제라고 생각한다한국은 너무 제한적이고 너무 작고 좁다돈도 없고컬렉터도 없고 전문가도 많지 않다

그래서 저는 어떤 생각을 하냐면다들 좀 나가야 된다는 것이다한국에만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자기 모순적이런 섬에 살고 있는 상황에서는 나가야 된다방법이 문제가 된다제가 관심있는건 뭐냐면굉장히 잘하고 있는 상위 5% 이내의 엘리트 작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게 아니라 나머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그 작가들은 어떤 면에서는 컨벤션지방대페인팅만 해서 그 외의 것은 모르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그 사람들예술가로서 커리어를 쌓아가고 싶고 그림을 그리고 싶고 그러면서도 더 큰 목표를 두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확실히 좋은 갤러리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갤러리 세대교체를 생각해본다

왜 갤러리가 작가들과 성장하면서 같이 발전하면서 마켓을 만드러내면서 높은 안목과 수준을 유지하면서 그렇게 말하자면 하나의 생태계 안에서 선순환 시킬 수 있는 갤러리가 왜 없을까 싶다그건 제가 해결할 문제는 아니지만 충분히 그 이야기를 해볼 수는 있다철학적인 문제는 논외로 하고 실용적인 문제로 보자면 그렇다

이주요
갤러리라는 시스템 자체가 낡았을 수 있다미술은 발명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발명한 것 처럼 시스템도 미술계도 미술안에 있었던 컨텐츠도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진상

중국은 관제 네트워크를 통해서만 행사가이뤄지는데 일본은2000년대 초에 판타지아같은 전시로 전면에 나온 지금의 50대 중반 작가들이 상당수가 동경대의 국제 미술 학과라는 것이 새로 생기면서 그게 아베정부에서 만든 것인데 거기 교수로 들어갔다국가적 어떤 문화 프로파간다의 전문에 그 작가들이 포진된 것이다굉장히 이상하다.

반면 우리나라에서 굉장히 많은 교류를 하게 된 나라가 대만 인도네시아 레바논이다레바논은 특정 갤러리 소속 작가들인 뢀리드라나 아칸사타리 (피드백요망)등은 한국에서 보게 되면서 마치 중동미술을 그들이 몰고오는 것 처럼 본다시립미술관에 가을에 또 열린다아시아라고 하는 지도가 굉장히 플렉서블 해졌다

한중일이라는 프로젝트를 같은 것으로 다루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생겼다.방글라데시 다카같은 아트센터가 떠오른다이렇게 되면 얼터너티브한 지도를 그려봐도 되는거 아닌가당분간그래서 아시아에 대한 이야기를 할때 한중일을 만을 프레이밍 안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주요

 90년대 주도적인 큐레이터 비평가들은 한중일이 시스템을 가지고 있을때 왜 한국만 굉장히 독특한가 한국의 동시대성은 상당히 유러피언같은가 에 대한 질문을 여러차례 받았다그것이 유학갔다와서 갖고 들어온 케이스도 많겠지만한국이 여러 지적인 존재들이 사실은 그런 이야기들을 계속 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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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바로, 함께, 한국미술 공개세미나 V / 2000년대 : 미술현장으로서의 세계




다시바로함께한국미술 공개세미나 V
2000년대 : 미술현장으로서의 세계

2019. 7. 27. 토 14:00-17:30
이음센터 이음홀(5F)
문화체육관광부예술경영지원센터 주관

1부 (현재페이지)

(2:00-3:30 사이 앞부분 내용 본글에 포함되지 않음)





김홍석     독일에서 유학하던 당시 아시아성, 한국적인 것을 보여달라는 요청을 받았었다. 독일의 미술가들은 ‘나는 왜 요즘에 하얀색이 좋지?’ 그걸 주제로 작업을 해보자 하는 식이었는데 아시아 남자로서 독일에서 공부하면 한국스러운 작품을 가져오게 하는 요구사항이 있었던 것이다. 그 아이덴티티를 표현하라고 하니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일본의 작품들에 대해서 현대적 일본식 스타일이 유행했기 때문에 억지로 생각해내야했다. 무언가를 만들어 내면 독일적이다, 서구식이다 하는 피드백을 듣곤 했다.    그 상황에서 작업을 하는 것이 자유롭지 않아서 서구에서 공부하는 것이 어려운 점이 있었다. 오히려 한국적인 것을 내세우는 것이 싫었고 내가 관심있던 것들을 하고 싶었다. 당시에 공동작업을 했던 사람이 물질성이 없거나 비물질적인 것, 무장소성에 관한 작업을 많이 했었다.   
번역의 문제 - 근대화 과정에서 경제 정치 교육을 번역하여 koreanized 된것을 기반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고 있음. 우리만의 새롭고 독특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본성 중에는 흉내내는 것도 있지만 나만의 것을 갖고 싶다는 욕구도 있다. 그래서 후자쪽에서도 관심을 가질 필요 있지 않을까 싶다.

이주요    나는 나라들을 옮겨다니며 작업했다. 한국은 부모님의 나라이고 부모님의 규칙은 무시하기 어렵다. NL에 가서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는 것은 한국에서 듣는 규칙을 무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다. 여기(한국)에서 살아가려면 체화된 채로 질문하지 않고 살아가야한다. 그러나 나는 환기되는 것, 질문하는 것을 원했다. 그래서 어떤 장소에서 익숙함이 느껴지거나 사람들이 친숙해지면 떠났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돌아다니면서 아티스트 지원 프로그램 등을 찾아다녔다. 중요한 메이저 집단 들에서 막내였는데 메이저 작가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역할 수행을 한 것임. 그래서인지 기회가 많이 왔다.  

세계화. 어려움들을 개인적으로 -기록을 통해서-극복하려고 했다. 그러나 80년대 한국에서의 삶을 어렸지만, 견딜 수 없어 했던 것은 결국 세계화에 준비된 사람이었기 때문아닌가 하는 생각. 지금 이 상태를 견딜 수 없어 어딘가로 가야하는 것, 여기가 아니라는 것, 거기서 굴러 체득하고 다른 상태에 놓였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지금 펼쳐진 현장에선 역할이 주어졌던 것 같다.


    언니오빠들-을 쫓아다니던 하녀(본인)는 많은 구경을 하고 다녔다. 그렇게 구경하면서 알게 된 것이 많았다 학교교육보다 현장을 굴러다니며 느낀 것들이 많았다. 그때 당시에 선배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 사람들이 나의 선배, 이걸 헤쳐나가고 문제를 테이블에 올려 풀어준 사람들을 선배로 삼았다.    (한국을 생각해보면) 내 자식이 여기서 살아도 될까, 내가 여기서 늙어도 될까, 사회 시스템과 아트 월드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한다.


    그동안 나에 대한 크리틱은 저게 예술이야? 가 대부분이었다. 그냥 전시를 해서 벽에 거는게 기쁘면 되는데 (나는 그게 동의가 안되었고) 동의가 안되는 것을 하는게 용납이 안되었던 것 같다. 벽에 걸려있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1초만에 지나가는거 말고, 무게가 있어서 집에 들고 가서, 원해서 샀을 테니 집에서 넘겨볼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싶었다.   




유진상    나는 화가였다. 작품을 전시했는데 전시를 네덜란드에서 해주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10점 넘게 작품을 도둑맞고 나니 그림을 그리기가 싫어졌다.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는 교편을 잡았다. 90년대 초에는 미국, 영국 미술시장이 무너졌고 94년도 기점으로 한국에서 페인팅도 무너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는 페인팅을 하면 바보였다. 사진이나 팔지 않아도되는 그런 작품들이 주류가 되었다. 공공기금으로 만들어지는 것들이 주류가 되므로 80년대에는 갤러리스트가 이끌어가던 시대와 달리 90년대 들어서 큐레이터로 문화 권력이 넘어갔다. 그때 당시에 큐레이터는 공부하던 사람들이었고 좌파적, 공공성, 막시즘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큐레이터로 직업을 전환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비엔날레가 시작하고 난 다음에 본격적으로 큐레이터 시대가 되었다.


     당시 평론 글을 써보라고 하니까 오히려 작업하는 것 보다 더 관심을 기울여 주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글을 썼고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학생들이 작업을 해야하면 어떻게 해야되냐고 질문을 했는데, 작업의 주제나 개념적인 것들을 주로 이야기하던 수업이었기 때문에 작업을 어떻게 해야되냐고 물어보면 애들한테 다 알려줬다. 그럼 애들이 다 그걸 가지고 작업을 한다. 그러면 또 작업이 하기 싫어진다. 그래서 그때 그때 다 이야기를 하고 나니 직접 작업은 안하게 되더라 (웃음)    그래서 글을 쓰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평론가가 되었다. 그래서 정현 선생니과 같이 정석적인 평론가가 되었던 것이 아니라 빈 곳이 많은 평론가다.


    90년대 말미부터 공장미술제가 시작되었는데, 유명 대학 출신이 아닌 학생들은 졸업하면 무엇을 해야하나, 당시 학생들을 가르치던 와중에 고민이 많이 되었다. 그래서 몇몇이 모여서 연합전을 해보자고 했다(공장미술제). 그전까지는 대학들 간 교류가 없었다 교육부에서 하는 교육대전이 있었는데 이건 관제행사라서 학생들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공장미술제에서는 큐레이팅을 했다. 세 명이서 움직였는데, 이영철, 홍명섭, 임용익 (피드백요망) 저, 이렇게 같이 움직이는데 갑자기 이대에서 하겠다고도 하고 서울대도 하겠다고 하는 식으로 다른 학교 학생들도 함께 하게 되었다.    그래서 12개 학교가 되었다. 그래서 이천에 양말 공장 가서 전시를 했고 꽤 잘되었다. 거기서 나온 작가들이 지금 40대 저명한 작가들인데, 거기서 첫 전시를 많이 했다.


     그 다음해에 또 전시를 했을 때에는 이미 미술대학 교육을 통해서 익히 관행적으로 알려져 있는 작업방식을 지양하고 뻔한 것을 하지 말자, 그리고 완전히 해외에 내놔도 괜찮을 정도의 작업을 업그레이드 하자는 생각으로 큐레이팅을 했다. 작가가 120명이었는데 석달 동안 집중적으로 한 작가당 3-4시간씩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작업을 좀 만들어서 전시를 했다.


    아트마켓 시장규모로 치면 우리나라는 (전세계) 0.3프로고, 90프로 이상이 Hans Ulrich Obrist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로 대표되는 엘리트그룹이 움직이는 통합된 세계 미술계가 있고, 그당시에, 그리고 시장도 거의 통합된 상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학생들을 가르쳐서 해외에 내보내는 것이 시급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컨텐츠가 괜찮아야 하는데 대부분의 대학원생들, 대학 갓 졸업한 사람들이 작업은 뻔한 것이었다.


    요즘은 세대 교체가 많이 되었기 때문에 모르겠지만, 당시만 해도 대학생들 사이에서 서로 교류도 없었다. 소수 대학에 이목이 집중되는 경향도 컸다. 그런데 공장예술제 하고 나니 예전에는 조명받지 못하던 학교들에 그 학생들이 두각을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로 네트워킹 하고 서로 이름들을 꿰뚫으면서 자기들이 지금 어떤 판도에서 작업을 하는지를 알게 되었던 사건, 이것이 흥미로웠다.     사실은 오늘 주제가 해외이다 보니까 (하는 말인데), 한국에서 작가로서 국제적인 활동을 하게 되는 방법은 두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굉장히 영어를 잘해서 네이티브 수준이라서 굉장히 네트워킹 잘하고 전시 참여하면서 커리어를 굉장히 인싸스럽게 쌓아나가는 방법이 있고, 다른 방법은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영어 못해도, 작업실에서 약간 이상한 애가 갑자기 작업을 해가지고 가져오는 것. 아싸인데 거기서 혼자 작업을 해서 재밌는걸 들고 오는 방법도 있다. 그래서 갑자기 해외로 나가기도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한지인 (피드백요망) 이라는 작가가 있는데, 경원대 출신인데 대학교 2학년때부터 두각을 나타내서 삼학년때인가 즈음에 주요 베뉴에서 전시하고 졸업하자마자 광주비엔날레 간 친구가 있다. 그런 식의 케이스가 있다. 근데 그건 굉장히 드물다.


    그래서 그런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현대미술 아무리 얘기 해봤자 좋은 작가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실질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토양이 있어야 한다. 한국은 좋은 면일 수도 안좋은 면일 수도 있으나 모든 이슈들이 한 방향으로 수렴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미술판도 그렇고 어떤 이야기가 비평계에서 나오기 시작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 방향으로 이야기를 한다. 한방향으로만. 그러다보면 젊은 작가들은 거기로 쏠리게 된다 나중에 결과적으로는 한쪽에만 사람이 있고 나머지 공간은 텅 비게 된다.


    미국-서구-은 공간을 듬성듬성 채우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빈 공간이 너무 많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저 같은 사람은 대학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제가 아카데믹하게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운동권 출신도 아니므로 특별히 소속된 그룹도 없다. 지나고 보니 혼자서 항상 어디서 뭔가 남게 되더라. 그래서 드는 생각은 작가들로 하여금 스스로 그냥 자기가 하고싶은 것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는 커리어 욕심도 없어지고 그러다 보니까 아시아 같은 행사도 주관하게 되었다. 예술계가 싫어할 만한 일이었다. ‘애들에게 돈 맛을 왜 들이냐’는 피드백도 있었다. 애들이 졸업하면 뾰족히 할 게 없고, 지방 전국에 페인팅 하고 있는 애들이 많은데 그럼 그 애들 졸업하면 어떻게 하냐, 누가 케어를 해주냐 이런 생각을 했었다. 대학미술혀의회가 있는데 가서 보면 선생님들이 반응은 반으로 나뉜다 유명대학은 하지 말자는 쪽의 의견이었다.


    텔레비전 리얼리티쇼도 있었는데, ‘기업들에 애들을 놀아나게 하지 말라’고 말리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왠지 하지 말라고 하면 하고 싶어져서 나는 했다(웃음).


    지금은 우리나라 미술계는 실용주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 되었다. 시장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많이 하고 특히 테크놀로지 관련된 이야기도 많이 하게 된다. 축구에 비유하자면 공이 한쪽에 굴러가면 모든 플레이어가 한쪽으로 가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못하는 축구다. 빈공간을 메워야겠다 하는 생각을 한다.  





<김장언(진행) : 지금까지는 세계화의 충격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베를린 장벽 넘어지고 국경 넘는 것이 가벼워지면서 오히려 뿌리를 내리는 것에 대한 부담이 생기면서 새로운 세계에 대해 마주하는 것, 새로운 작업방식등을 모색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한국 미술계가 해방 이후 차곡차곡 쌓아온 지역적 시스템이 세계화 충격으로 어떻게 와해되었고 어떻게 다양성이 확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도 저변에 깔려있다.>


장승연 질문 : 김홍석 선생님의 2007년 작업, 국가라는 경계를 유머러스하게 비판하던 프로젝트가 기억나는데 다른 협업 작가들을 만나게 된 것도 환타지아 언더컨스트럭션 전시에서 당시 아시아 현대 작가들을 만났다 라는 인터뷰를 하신 것을 보았다. 이런 프로젝트도 새로운 시도를 글로벌리즘의 영향을 받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김홍석 : 정확히는 2007년 시작이 되었으나 2006년 미술관에서 개별로 초청을 받았고, 협업작가들은 칸톤도쿄라는 이름으로 듀엣으로 참여한 것인데, 세 사람이 다 오래 전 부터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쉽게 세 사람이 결성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만나기가 쉽게 된 것은, 작가가 많은데, 일종의 유랑 극단 같은 의미로 어느 나라 대표로서 만나게 되었던거 아닐까 싶다.

 약간 다른 길로 빠지자면 전시라는 것을 90년대에는 작가라는 작품보다 작가들이 전시를 이해하는 시즌이었던 것 같다. 전시라는 것은 기존의 미술관이 기획하던 것인데 그 이후 전시 형태가 다양히 생겨나면서 대안 공간도 생겨나고, 비엔날레도 있고, 다양한 정체불명 전시가 생기다 보니까 내 작품이 아틀리에 떠나서 여기 설치되는 것이 의미가 뭔가에 대한 고리타분한 생각은 끝나고 오히려 전시 사이클을 공부하는 적극적인 작가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전시가 생겨나니까 그 다음에 작가들이 그런 변신을 했다. 그래서 당시에 유랑극단처럼 초대받으면 거기에 갔던거고, 한중일 작가로서 만나면 서로 미술에 대한 개념 차가 있었다.


 그래서 전시개념으로 만나지 말고 우리가 작품으로 만나보자하는 프로젝트였다.


    두번째로는 절대 우리가 한중일 하면 떠오르는 그런 이미지는 연루시키지 말자는 생각을 했다. 프로젝트성 작품을 하자, 선입견을 가지는 것도 한중일 어떤 것도 언급하지말자고 했다.  언어도 잘 안되서 소통도 문제였으나 상당히 나이가 든 상태였기 때문에 마음이 편했었다. 큐레이터가 제안을 했다. 이번에는 콜라보 하면 어때? 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그 날로 만들었다.    한명은 북경, 한명은 동경 그러면 서울은 뭐냐 서경인가(웃음) 근데 서울은 서경은 아니다. 그래도 서경을 중국식 발음으로 하면 멋있겠다 생각해서 만장일치로 그 이름을 정했다. 그 이후에 기약없이 약속을 하고 난 다음에 다시 언급하고 몇개월 뒤에 초청을 받아 부랴부랴 작업을 했다.


    마무리하자면 동 프로젝트는 정치적 역사적 의미를 배제한다는 의미로 시작했던 것임.  


1부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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