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27일 금요일

[강의] 한국 남성을 분석하다 - 페니스 나르시즘과 페니스 파시즘에 대하여

[강의] 한국 남성을 분석하다 - 페니스 나르시즘과 페니스 파시즘에 대하여
건국대 문과대 교수동 401호 
2017.10.26 18:30-
윤김지영


* 2017-10-28 23:18 수정본

한남 이라는 단어는 권력 전복적인 효과를 낳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지금까지는 여혐이 보편의 상식의 이름으로 재생산되어왔었다. 여혐의 언어는 발화의위치점이 지워져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한남이라는 말이 발명되면서 여혐의 발화 위치가 폭로되었다여태까지 위계적인 젠더 이원체계 안에서 남성이라는 다수자성과 강제성을 지닌 사람들은 이사회의 표준점이나 보편의 자리, 준거점의 자리로 항상 등치되어왔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를 들어 설명해보고자 한다. 콜럼버스는 개척자나 위대한 모험가로 알려져있다. 그런데 인디언 원주민에게는 침략자 말살자 등으로 알려져있다. 우리는 백인이 아닌데도 역사는 강자위주로 기술되어있기 때문에 백인의 관점에서 묘사된 발화위치점이 지어진채 진리의 이름이자 보편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편향적인 권력효가가 있는지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남성성의 자리가 편향되어있다는 것이라는 것을 폭로하는 것만으로 전복적인 효과가 생산되고 만 것이다페미니즘이라는 소수자 정치학 효과는 지배자의 언어가 어디서부터 나오고 있는지, 어디서 기인된 것인지그것을 추적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이제 본격적으로 우리 현실의 지반을 구조화하고 직조하는 젠더 이원체계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한다.
 

젠더 이원체제라고 하면 드는 오해는 세상에 여성과 남성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마치 남성과 여성이 대등한 방식으로 세상에 놓여있다고 생각하지만 젠더 이원체제라는 것은 남성중심적인 여성 억압구조 즉 남성 특권구조 안에서 남성의 타자로 규정된 여성이 어떤 방식으로 착취와 자기혐오로써 여성혐오를 재생산하는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젠더 이원체제는 남성중심적인 남근 일원주의라고 할 수 있다. 남성과 여성이 두 존재원리로 대등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 모든 인간의 표준이고, 그렇기 때문에 동일노동 동일 임금을 아직도 쟁취 하지 못하고, 여성 정규직과 남성 정규직 임금 격차는 36.6%가 나고, 여성 비정규와 남성 정규는 70%이상이다. 문제는 여성의 대부분 고용형태는 비정규형태이기 때문에 36% 수치도 여성이 정규직 편입때에나 적용되는 것이다.
 
남근 중심으로서의 젠더 이원론을 해체하기 위한 페니스 나르시시즘

페니스 나르시시즘. 이것은 무슨 말인가? 나르시시즘이라는 말은 자기애를 구축하는 방식이다. 내가 나신을 어떻게 생각하는다. 나는 나를 어떤 관계를 맺는가. 나라는 존재가 단항나의 통일된 것이 아니라 어떤때에는 자존감이 높지만 어떤때는 낮다고 할 때 내가 자존감, 애착의 정도가 나르시시즘. 페니스 나르시시즘은 어떻게 페니스라는 기관이 한 남성의 전체적인 정체성을 구성할 때 가장 중요한 자기애의 도구화가 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다.
 
이를 도입하기 위해 저는 프랑스의 자크 라캉의 논리를 도입하고자 한다. 페니스라는 생식적인기관으로서의 페니스도 있지만 남근이라는 말로 팔루스라는 용어도 있다. 보통 우리가 번역할 때 나근은 팔루스와 페니스가 전혀 구분이 안되어서 둘다 남근으로 번역되지만 라캉은 2가지로 해석한다.
 
첫 번째는 생물학적이고 해부학적 기관으로서의 페니스고, 두번째 의미인 팔루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질서는 아버지 법질서 그 자체다.

예컨데 저는 주민등록상 윤지영이지만, 페미니스트 활동할때는 윤김지영이다. 이름은 부계혈통 주의고 남자의 이름은 항렬이 이미 정해져있어서 가족내의 권위자가 이름을 지어준다. 내 이름조차, 내 성씨도 내가 결정해본적이 없다.
 
언어질서가 왜 페미니즘적으로 남근 중심적인 아버지 법질서인가? (아버지 법질서는 자크 라캉의 이야기다. 언어는 아버지 법질서라고 이야기한다.) 표준형이 남성이 독점적으로 질서지워졌다는 것이다. 교수는 남성이 일반적으로 가져온 직업군이기에 남교수라는 말은 없다. 여전히 남성중심적 가치질서가 재생산된다는 것이다. 이때 아버지 법질서의 가장 중심되는 것이 팔루스이다.
 
초월적인 기표로서의 팔루스

팔루스가 왜 가장 중심되는 축인가? 어려운 이야기일 수 있는데 팔루스라는 것은 가장 쉽게 이야기하면 상징적인 힘, 권위, 권력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팔루스가 갖는 의미는 이것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조금 어려운 말로 팔루스를 초월적인 기표라고 한다.
 
기호학적 접근 방법은 소쉬르에 의한 접근방법인데 기표와 기의로 나뉜다. 기표는 무엇인가? 집은 한국어로 집이고 프랑스는 메종이다. 소리가 기표다. 그럼 기의는 무엇인가? 집의 뜻은 사랑하는 사람 친구와 함께 살면서 의식주를 해결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기의는 뜻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호는 그 음과 뜻이 함께 합쳐진 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이 소쉬르 언어학을 가져와서 비틀어보자. 소쉬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기의다. 라캉은 기호에서 중요한 것은 기표라는 이야기를 한다. ? 팔루스는 초적인 기표라고 했을떄, 초월적인 음이라고 해쓸 때 왜 이이것이 초월적이냐하면 대부분이 이 사회의 언어질서 안에서 페미니즘 과점에서 볼 때 남성이라는 기표가 있을 때, 영어로 man, homme라는 기표가 있을 때 이기표는 사회문화적으로 뜻이 한정된다. 남성은xy염색체라 여성보다 물리적 근력이 있고 신체적으로 좀 더 크고 등등의 여러 뜻을 통해 사회 문화적 반경 내에서 남성이라는 의미는 특정한 의미로 항상 제한된다. 대부분의 기표와 기의가 갖는 특징이다.
 
초월적 기표인 팔루스의 특징은 모든 뜻들을 다 포식하는 것처럼 다 집어삼킨다는 것이다. 팔루스는 페니스라는 생물학적인 기관으로서의 생식기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상싱적인 권위와 힘, 권력이 되기도 하고 팔루스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 될 수 있다. '거시기'라는 단어는 형용사 명사동사라고 쓰일 수 있을 때, 그 뜻은 아우를 수 있는 뜻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이 바로 그 역할을 팔루스가 한다왜 이것이 초월적인가?
 
식민제국주의에서 누가 이 세상의 모든 영토를 누비며 이땅이 내거다 하면서 정복욕과 포식적 방법으로 타자를 자기안에서 동원시키는 것이 식민제국주의였던 것처럼 팔루스는 모든 뜻들을 흡수하고 다 동화시킴과 동시에, 그게 왜 특권적이냐면 자기는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지만 다른 기표. 즉 남성과여성이라는 성적 차이가 발생했을 때, 여성이라는 기표가 무엇을 뜻하는지 한정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자신은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지만 다른 기표들은 다른 기의에 한정적으로 얽메이게 하는 효과를 바로 팔루스가 갖고 있다.
 
이것이 초기 라캉이 팔루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초기 라캉은 5-60년대저작이다.) 그의 저작에서 팔루스는 페니스와 동일시될 수 없다. 팔루스와 페니스는 등치할수 없다고 강변을 한다. 그런데 후기가 되면 다시 말해서 70년대 이후가 되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한다. 철학자나 사상가를 보면 초기 비트겐슈타인과 후기비트겐슈타인처럼 나눈다. 왜냐하면 사상의 궤적은 여러 다른 교류, 변동, 맥락 속에서 생각이 변하고 자기가 이야기하는 사상의 이론을 좀더 정교화하는 방식으로 변형되기 때문인데 라캉도 그랬다.
 
후기 라캉은 세미나 23에서 아주 충격적 이야기를 한다

초기 라캉은 페니스는 팔루스의 일부라고 하였고 전적으로 다른 것으로 하나, 후기 라캉은 (아직 우리나라에 번역안되었으나 불어본 15페이지에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 

"팔루스는 이성적으로 말하는 말의 기능과, 무엇이 합쳐진 것인가? 말과 함께 합쳐진 것이인 기생충인 작은 꼬리가 합쳐진 것이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이성적인말과 함께 합쳐진 것이 기생충, 작은 꼬리를 의미하는 것이 페니스다. 불어에서 페니스의 속어가 꼬리라고 한다. 꼬리에 해당하는 페니스가 기생충으로 묘사되고 이 기생충인 페니스와 이성적인 말의 능력이 합쳐진 것이 팔루스를 구성한다고 한다.
 
왜 이 전개방식이 기존의 초기 라캉을 뒤집는것인가

초기 라캉에서는 팔루스라고 하는 것은 페네스보다 훨씬 이상이 높고 절대적인 것인데, 페니스가 오히려 팔루스를 구성하는 것 자체가 된 것이다. 팔루스가 구성되기 위해서는 페니스라고 하는 작은 꼬리, 기생충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는 점을 이야기 한 것이다.
 
페니스는 기생충인 작은 꼬리라고 했는데 이 기생충에 의존하는 것이 팔루스라는 것이 무엇인가? 팔루스는 강력하고 아무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통일성 전체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팔루스라는 남근 질서의 축이야말로 페니스라는 아주 유약한 꼬리에 의존하고 있어서 붕괴되고 해체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그사람 또다른 저작인 에크리에서 이런선언을 한다.‘대타자는 없다.’ 대타자는 팔루스라고 할 수 있다. 팔루스의 특징은 절대적이고 완전 무결한 구조, 질서를 대타자라고 했을 때, 그런 완벽하고 총제적이고 결함없는 다층적 구조로서의 대타자는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남근질서를 붕괴할 수 있고 파열할 수 있는 지점을 열었기 때문이다. 즉 페미니스트들이 ᅟ남근질서를 부수겠다고 떠드는데 후기라캉이 그 단초를 준 것이다. 페니스라는 작은 꼬리, 그것에 의존한고있는 팔루스야말로 단한번도 완벽하게 완성되어있던 적이 없다는 것이 후기 라캉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페니스에 대해서 한번 더 심층적으로 분석해보자

페니스는 생식기적인 기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크 라캉이 자기가 프로이트를 계승했다고 보고 계승자로 선언하는데 프로이트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이성애자로 태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교정되고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이성애자로 여성이나 남성으로 안착하거나 실패한다. 프로이트는 아이가 태어날때부터 다형적인 변태성을 가지고 있고 범성애적인 존재라고 설명한다. 아이의 성에너지가 투영되는 대상은 몬갖 사물이 된다. 찰리브라운은 온갖 담요를 애착하면서 그것을 애착한다. 아이들은 범성애적으로 모든 사물, 자신의 몸에서도 성역동 에너지 투영시 생식기도 필요없다. 모든 몸의 감각이 다 일종의 성감인 것이다. 어린 아이는 범성애자이자 모든 몸의 감각이 열려있는 상태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이성애자로 교정하느냐?
 
아이는 먼저 구강기라고 하는 모든 것을 입으로 가져가는 시기, 무엇인지 알고싶은 것 조차 입으로 가져가는 시기를  겪는다. 먹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탐색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감촉과 촉각 미각을 가지고 성역동 에너지를 투영할 대상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기간이다.
 
다음으로는 항문기를 거친다 지금의 어른은 화장실과 아닌 곳을 나누기도 하는데, 배변보는 곳은 더러운 것 등등으로 분리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기지만 항문기의 아이는 일종의 그 배변물을 가지고 신기해한다. 분명히 내 몸의 일부인데 내 몸안에서 나와서 내것인데 배출되었을 때 내것이 아니다. 하지만 완전히 내것이지도 내것이 아니지도 않는 상태로 이것을 가지고 논다. 배변활동을 하기 전에 기저귀 떼기 전에 배변물을 가지고 놀았다는 에피소드를 갖고 있을 수 있다. 또 항문기 아이는 괄약근을 조이는 상태를 통해서 쾌락, 쾌감을 느낀다
 
그후 남근기로 오는데 이때 남근은 생식기가 아니다. 자존감의 정도, 자기애의 정도를 확인할수 있는 기관이 남근이다. 그때 표현되는 남근은 페니스이지만 이때의 페니스는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 거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인터섹스를 상정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남아든 여아든 다 페니스를 갖고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여자아이 조차도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때에 모든 세상의 사람들이 다 남근을 가졌다고, 남근 일원주의라고 설명하는데 모든 사람들이 다 남근을 가졌다고 보는 것은 유아에게 자기중심적인 것이다. 내가 남근을 가졌기에 다른 세상의 타자도 남근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남근일원주의로서의 페니스 이론이다

남아도 여아도 활발하게 자위를 한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나 또래의 클리토리스를 눈으로 보는 장면부터 문제가 생긴다. 아이의 생각에는 엄마도 누나도 모든 사람도 다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기저귀를 갖는 과정에서 페니스가 자기와 같은 형태가 아니라 무언가 잘려있고 결핍되었다는 것을 문제적 상황으로 인식한다. 그때 남근적인 상황은 자기애 구축이자 확인 기관이다.
 
남아는 클리스와 페니스의 차이를 본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중심인 나는 제대로된 페니스를 갖고 있는데 얘는 무엇인가 결핍되어서 원래 있는 페니스가 잘려진 상태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공포감을 느낀다. 모든 사람들이 다 페니스를 갖고 있어서 이것은 영원히 내 몸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내가 영원히 소유할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페니스가 잘려있다는 것은 내것도 언젠가 위협적인 상황에서 잘릴 수 있다는, 거세공포를 느끼기도 한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잘리지 않기 위해 나는 어떻게 하는가 나의 나르시시즘적인 자기애애 타격을 받는것인데 난 그러고싶지 않아. 온전이 내것으로 보전하고 싶어, 하는 욕망으로 인하여 어떤 거래를, 타협을 하게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남자아이 여자아이는 모두 주 양육자인 어머니를 사랑의 대상으로 둔다. 그때 왜 하필 어머니인가? 프로이트가 그린 가족상은 브루주아 엄마아빠아이 중산층 이성애 가족이었기 때문에 그당시 엄마의 역할은 임신 출산 양육 등등의 역할을 엄마라고 이야기 했고 모성의 발명은 그 이후에 나온 주양육자의 존재는 엄마로 상정된다. 엄마는 첫 번째 사랑의 대상이 된다. 아이에게 있어서 엄마는 생존의 기반이다. 자기의 몸의 일부로 생각한다. 배가 고프면 생존하기 위해서는 주양육자가 먹이를 줘야 하고 떠먹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가 울면 즉각 이아이가 배고픈지 잠이오는지 등등을 해석해서 아이의 생존기반을 담당하는 그 아이의 연장된 입이자 기관이 되는 것이다.
 
엄마는 그 아이의 신체의 일부로서 첫 번째 욕망대상이다. 그래서 모든 아이는 엄마와 합일되려고 한다. 근친적인 욕망이 라고 다른 말로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런 욕망을 가진아이가 페니스라는 나르시시즘적 기관을 보전하려면 엄마에 대한 욕망을 철회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아빠의 경쟁관계가 생기기 때문이다. 아따에 의해 내가 제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빠가 근친적인 욕망이라고 하는 것을 실행하고 그 근친상간의 터부를 넘어선 아이의 페니스를 거세할 수 있다는 그 공포를 누르기 위해서 엄마는 아빠의 것으로 양보를 하고 남자아이는 엄마와는 다른 여성에게 욕망을 전이하고 자신의 페니스를 보존하고 정상성이라는 아버지 법실서로 편입되는 것이 오디이푸스 콤플렉스의 해소다.
 
여자아이는 어떤가? 나의 제 1의 욕망의 대상으로 하기에는 엄마조차도 결핍되어있고 나도 결핍되어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는 이성애자 남성애게로 욕망이 넘어가는 것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벗어나는 방식이다. 이때 페니스는 자기애의 확인 장소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페니스 나르시시즘은 어떤 몸을 구성하는가?
 
자기애의 확인 기관으로서의 페니스 나르시시즘으로 인해서 개별적으로 여성과 대별되는 것으로서 개별적인 정체성화의 과정을 통과했을 때 남성은 바로 방기하는 몸을 만든다.
 
술을 마시고 길에 널부러져 잘수 있는 몸. 전기검침원이 온다고 했는데도 팬티바람으로 나가는 것, 노상방뇨 하는 것, 왜 남자들을 키울 때 아이가 오줌마렵다고 하면 남자의 경우는 여기서 눠 여자아이는 어떻게든 가리려고 하는것, 왜 남성이 배변활동을 하고 손 씻는 비율이 왜이렇게 적을까? 물을 마실 때 왜 입을 대고 마시는가?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왜 방기하는 몸이라고 하는 것이 남성이 몸을 구성하는 사회적인 효과라고 할 수 있는가? 하고 물어볼 수 있게 된다.
 
방기하는 몸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신체를 운영하는 방식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지하철에서, 불특정 다수의 여성에게 쌍욕을 하거나 화를 내는 것, 공간을 굉장히 불유쾌한 방식으로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이들, 쩍벌을 할 수 있는 이들은 왜 대부분 남성일까? 왜 훨씬 더 빈도수가 많을까? 왜 사회적으로 몸을 드러내고 운영하고 움직이는 방식에서도 방기하는 방식이 드러날까?
 
여성들은 택배가 와도 옷부터 챙겨입는다. 적어도 상대가 불유쾌하지 않도록 옷부터 입는다. 지하철에서 여성이 쩍벌하면 인터넷 동영상 올라간다. 어떤 곳에 앉을 때 다리를 모으고 앉는 것. 그것뿐만 아니라 노브라를 하면 난리가 나는 것, 항상 어릴때부터 여자아이 키울 때 여자애가 이렇게 더러우면 안되 방이 더러워서 되겠니 항상 여자는 깨끗해야지, 남자앤 좀 다를 수 있지만 등등. 여성은 끊임없이 청결, 단속하는 자기 몸을 구성한다.
 
왜그럴까. 페니스 나르시즘으로 한번 분석해보자

이 사회 구조에서 남성은 자기애 타격을 받지 않는 존재다. 남성의 몸은 방기하는 몸이 된다는 것은 이 사회에서 문화적으로 권력을 누리는 몸이라는 의미다. 권력을 누리는 몸만이 방기할 수 있다. 방기하는 몸이 가능한 것은 화장실에서도 손안씻고 나와도 내가 뭐가 더러워 할 수 있는 것은, 내 몸은 온전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나의 몸은 결핍이 없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면 내 몸은 공격을 받을 수 있는 몸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몸은 오염받거나 더럽혀질리 없다는 확신에서 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성은 자기 단속, 냄새가 나는지 손이 깨끗한지 등등의 자기 청결의 유지, 어떤 방식으로 가리고 웃어야하는지 등등의 단속을 받는다. 여성의 몸은 페니스 나르시시즘에서 뻥뚫린 몸, 완전하지 못한 몸, 공격당할 수 있는 몸, 더럽혀질 수 있는 몸, 오염될 수 있는 몸이라는 점에서 출발한다.
 
여성 혐오적인 용어인 보징어는 아주 횡행했다. 보지 + 오징어. 희화하 하고 혐오의 대상으로 타자화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이 무엇때문인가 라고 하면? 그것은 여성의 몸은 방기할 수 없고 항상 결핍된 그 불완전함 몸은 완전한 몸에 비해서 그것을 상쇄하기 위해서 더 단속하고 더 씻고 더 청결해야하는 것이다. 그것이 일종의 위생상에서 나오는 더러움을 보징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은 여성의 성기가 남성의 페니스가 가지는 상태를 갖지 못하는 결핍된 상태를 의미하는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면 페니스 나르시시즘은 내가 더러운 것이 아니라 저 타자인 여성의 몸이 더러운 것으로 만든다. 그것 뿐 아니라 항상 도덕감정 안에서 수치심과 부끄러움의 몫을 항상 여성의 몫으로 둔다. 남성이 가지는 일종의 수치스럽고 부끄러움이라고 여길 수 있는 약자의 모습, 유약함의 모습을 타자의 모습인 여성의 모습으로 바깥으로 투사하면서 정상적이고 규범적인 남성성은 마치 그 더러움이나 오염의 가능성이 들어올 여지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페니스 나르시시즘이 구축되는 방식이다.
 
쪼그리고 앉는 남자 아이에게 너 왜그렇게 앉아, 하는 교정을 한다. 여성적인 것으로 보이는 태도를 했을 때 거기에 대한 즉각적 교정이 들어오고 여성적인 방식이 그렇게 특정되면서 그렇게 '여자처럼' 되지 않는 방식으로 남성이 구성된다.
항상 부끄러움과 수치심의 몫을 여성의 몫으로 돌리는 것. 불법 도촬, 찍는자 보는자 유포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데 거기에 찍힌 피해자가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이민가고 자살을 하는가? 왜 항상 소수자인 여성의 몫이어야하는가? 라는 이야기가 가능한 이유다.
 
일종의 윤리적 감정 체계에서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어떻게 소수자에게 특화된 감정이 되느냐에 따라서 차별받는 원인을 소수자는 자기에게서 찾는다. 자기에게로 그 원인을 돌릴 때 자기혐오를 겪을 수 밖에 없다. 내가 여성으로서 겪는 그 모든 차별이 구조적 모순이 아니라 이 결핍이 언제든 삽입당할 수 있고 제압당할 수 있는 여성의 신체성자체에서 나온다고 생각할 때 여성들은 자기혐오로서의 여성혐오를 내면화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그 여성혐오를 자기혐오로 재면화하는 정치가 페니스 나르시시즘에서 여성을 정의내리는 방식이기도 하다.
 
페니스 나르시시즘은 어떤 몸을 만드나?
 
온전하고 결핍없고 공격당하지 않고 사회문화적으로 보면 승자와 강자로서의 규범적인 남성의 몸을 구성한다. 이런 남성의 몸이 무엇인지 보려면 다른 것이 필요하다. 남성의 몸은 그 자체로 자기충족적이 아니다여성의 몸을 대비적인 것으로 상정해야한다. 남자가 근육이 있어야지 어깨가 있어야지 등등이 있어야 한다. 그와 대비되는 여성이 대척점에 놓여야 한다. 남성의 몸뿐만 아니라 여성의 몸도 반드시 그 대비항으로서의 표준점인 몸이 상정되어야지만 어떤 몸인지 인식된다. 그때 남성의 몸이 구성된다는 것은 타자로서의 여성의 몸에 대한 혐오, 열등화, 비하를 통해 무엇이 남성적인 몸인가가 구성된다

이때 여성의 몸과 다른 남성의 몸은 삽입하는 자, 여성을 공격하고 리드하고 공격적이고 말하는 자다. 여성은 오염당하고 더렵혀지고 삽입당하는 자로 상정된다. 이중적인 성규범이 이렇게 작동되지 않는가?
 
대학도 굉장히 보수적이다. cc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커플이 깨어진 후에 혹은 cc가 있을 때 '너희 어디까지 갔냐'고 물으면 남학생은 별생각 없이 아 우리 잤어, 할 수 있는데 여학생은 폐쇄적 공동체에서 그 사실을 부인하는 방식이 가장 자신을 보호하는 방식이 될 수 밖에 없다. 남성적 몸은 무엇인가를 찍고 탈취하는 강자의 몸으로 구성되나 항상 여성의 몸은 무엇인가를 빼앗기는 자, 남성성이 결핍되고 그 온전성이 더 타격을 잃은 자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런 페니스 나르시시즘이 신자유주의하에서 위협된다

불안정 고용형태이기 때문에, 예전과는 달리 경제적인 역할이 위축된다. 가장이 공적영역에서 임금노동자, 생산자로 되고 사적영역에서는 결혼을 해서 가장이 되고 다른 질문을하는 삶이 불가능한 때였다. 집에서 가장이 되고 아버지와 남편으로서 일종의 권위를 사적인 영역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이 정해진 경로였다. 그랬을 때 페니스 나르시시즘은 견고히 보존되는 것 같았으나 신자유주의에서 남성은 비정규직으로, 노동시장으로 진입될 뿐만 아니라 사적 영역에서 연애와 결혼도 더 힘들어졌다. 페니스 나르시시즘을 강화하는 지반이 점점 무너져내린다. 

페니스 나르시시즘이 보장받았던 때는 어떤 방식으로 세대가 계승되었냐고 하면, 소위말해서 상징적인 아버지를 살해하고 그 자리를 내가 갖게 됨으로써 그 자리를 물려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것이 이제 더이상 어렵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김태희와 비가 아이를 낳는데, 비는 맨주먹으로 내가 여기까지 올라갔다, 고생했다 이제 내가 김태희와 그 김태희가 낳은 아이로 내가 얼마나 성공했는가, 비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것인가? 굉장히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연민에 찬 페니스 나르시즘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그게 힘들다어른들의 세대가 가진 기득권을 우리는 그것을 나눠갖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남성성을 보존할 것인가? 이 페니스 나르시시즘을 어떻게 전수하는가? 아버지라는 상징을 살해할 수 없다면 그럼에도 나는 강자와 승자로서의 남성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또다른 묘책이 있다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페니스는 반드시 비교를 통해서 구성된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내가 아버지를 이길 수 없다면 대비적인 몸으로서의 여자를 더 약하고 더 무해하고 유약한 존재로 만들었을 때 그 무지하고 유약하기 짝이없는 여성과 대비되는 자로서의 강한 남성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주류 미디어에서 계속 생산해내는 여성의 모습은 여성이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 아니라 그 시대의 남성성의 구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 내가 강력하지 못하면 더 제압하기 쉬운, 나의 남성성에일말의 가격도 할 수 없는 내 손아귀 에 있고 제압할 수 있는 여성을 원한다

로타류의 사진은 이 페니스 나르시시즘을 보전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강한 여성에 대해서 묘사하던 이전과 확실히 달라졌다.
 
로타류 이미지 분석에 대한 분석.

페니스 카르텔의 보존법 - 무해한 여서성 재현 체계의 강화
 
1) 무해한 여성의 미학화

로타류 이미지의 두가지 전략이 있다. 파스텔톤, 아기자기한 오브제, 봤을 때 나의 미감이 확장될 것 같고 예쁘고 귀여운 것이 된다. 보통 야한 잡지는 무언가 위생이 안좋아보이는데 무언가 귀엽고 몽환적이고 깨긋하고 도오하적 순수한 파스텔 톤의 색감을 통해서 정말 순수하고 무해한 여성들을 배치해둔다.
 
주로 교복, 세라복, 체육복, 유아 아동복. 조그려 앉거나 누워있거나 등돌리고 있는 등의 모습을 취한다이 모습들을 보면 저항의 의지가 없다. 오빠가 원하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오빠가 원하는대로 할 수 있는 남성 중심적인 욕망의 그릇이 된다. 소위말해 남성이 자기 타격을 입는 방식으로 자기보다 똑똑한 여자, 나기의 구애를 뿌리치는 여자를 보면 자기를 무시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아이같고 순진무구하고 무조건 yes하는 식으로 묘사된 여성이 왜 필요한가? 남성을 타격하지 못하는 것이다. “오빠가 원하는 대로 해라는 것이 가능한 여성의 묘사다.
 
2) 사지절단의 테디베어 이미지, 시체정 애적 무력화의 극단화
 
손발이 다 잘려야 한다 도망가지 못하려고 통제되어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 사우디에서 여성이 운전 못하게 하는 것은 왜그랬을까? 여성의 공간 이동은 남성의 통제를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제야 법적으로 운전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말이다.) 손발을 자르는 테디베어적인 이미지는 여성은 남성의 성욕 배출되는 기능외에 다른 기능은 하지 않는다.
 
손발이 잘린 상태는 완전 영유아의 상태, 밥도 화장실도 혼자 갈수 없는 상태를 성인에게 재현한 것이다.
 
손발이 잘린 것 같은 모습, 입술에 핏기가 없고 손 부분이 흙으로 있는 등과 같은 시체성애적인 모습도 배치한다.
 
 
이 두가지 이미지를 통해서 아름다움과 도발, 소프트와 하드코어를 수위조절을 하며 파급력을 가지고 지금도 계속해서 생산되고 증식된다.
 
1) 은 순응하는 여성은 남성이 그 아름다움이라는 왕관을 쓸 수 있게 해주는 것. 어떤 것이 욕망되는 몸인가를 보여준다. 그런데 2) 는 이렇게 무해한 여성을 길들인 남성이 언제든 남성성으로 그 여성을 마음대로 으깨고 죽일수있다는 힘의 과시다. 내 말을 잘들을때는 아 귀여워 예뻐 먹여주고 재워주나, 언제든지 이 길들여진 존재가 남성이 욕망이 담기는 백지같이 그림그리도록 하고 언제든 그 백지를 구길수도 찢을 수도 있다

이는 남성성의 힘의 과시다. 이 그림은 단순히 여성의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는 것이아니라 관계성을 보여준다. 시대적으로 강박적으로 요청된 남성성이나 여성성을 보혀주는 재현 체계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비판을 하면 로타류의 이미지를 옹호하는 자는 니가 안예뻐서 질투하는 거야, 하는 반응을 보인다. '네가 못생겼으니까 그렇지. 너도 예쁘면 저렇게 되고 싶을걸?'

비판하는 사람은 '아름답지 못할 것이라는 것.' 예쁘다면 마땅히 로타류 이미지에 편입되려고 노력할 것이라는 재반박인 것이다. 그래서 로타류 이미지를 비판하면 너 못생겼어, 성적 엄숙주의라는 것도 있다. 여기에 대해서 반박해보고자 한다.
 
페니스 나르시시즘에 대한 저항법
 
왜 로타류 이미지를 거부하는가? 남근적인 역동이 생산하는 일방적인 여성체계가 여성의 욕망을 반영하지 않고 거기에 그려진 여성은 항상 보여지는 몸이다. 그때 보여지는 몸이 놓여있는 그 방식 안에서 어떠한 몸은 지금 지워지고 있나, 어떠한 몸은 지금 응시하는 눈으로 항상 지워져있는가? 바로 남성의 몸이 지워진다

정말 우리가 그 사진들을 통해서 아름답게 생각하는 것을 다양하게 확장하는 것인가? 그런데 왜 다 피사체는 어려보이는 여성뿐인가? 병든몸, 살찐몸, 장애몸일 수 있는데 아주 정형화된 특정화된 그 '아름다운' 이미지는 남성의 페니스 나르시시즘을 가격하지 않는 방식으로만 재현된다. 미감이 오히려 축소된다.
 
제가 비판하고자 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이탤릭체의 말과 그에 대한 선생님의 반박)
 
"넌 못생겼다 그러니까 그러지."

= 이 말에 '난 아닌데?' 하는 것 조차 내가 아름다움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남성이 정한 아름다움의 방식에 순응하고 편입해야한다. 이는 아름다움이라는가치도 남성이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예쁜애들은 저거 찍으면서 좋아해, 자기만족해, 자청하는거야. 나의 자존감이 올라간다고 하잖아. 내가 좋아서 한 일이잖아 라는 말하는 것도 있는데? , 이게 성적인 자유다.. 로타류 이미지 반박하면 넌 성엄숙주의야"
 
- 페니스 나르시시즘을 강화하는 방식은 남성중심적 욕망에 순응하는 자만이 아름다움도 갖고 자기애도 갖고 자유도 갖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욕망 뿐 마니아 우등화된 모든 질서를 남성이 일방적으로 독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이탈하겠다고 하면 넌 자존감도 낮아, 너는 니몸을 보면서 너를 혐오할거야, 넌 저걸 찍을만한 몸이 아니니까, 넌 추하니까, 자기부정하는 존재야 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등의 낙인을 찍는다.
 
결국 로타류 이미지를 보면서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생각하면 덩달아 자유롭기까지 하는 것이다. 순응하라 그럴수록 더 자유롭다. 이는 가장 지배하는 자의 말이다

또, 성적인 자유를 억압하는 거라는 점 그때 성적의 자유는 남성 중심적인 성적 자유다. 남성 중심적인 성욕만이 방기되고 방출되는 그 구조에 대해서 딴지를 걸고 그욕망만이 다가 아니라고 이야기할 때 그것은 남성적 욕망의 방기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같은 페미끼리 조차 로타류 이미지에 대한 비판을 검열주의 엄숙주의라고 이야기한다면 그런 전제는 결국 남성중심적인 성적 역동만이 유일한 질서라고 할때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로타류 이미지 비판 아래서 남성중심적인 방식으로 일방적으로 여성이 재현되고 욕망하는 대상으로 축소되는 것으로 문제제기 하는 것은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욕망하는 방식이 아니다, 다른 방식으로 욕망을하겠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욕망이 담기는 방식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것을 드러내서 내가 갖고있는 성역동이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남성 중심적인 판 안에 머무르게 될 때, 로타류 이미지를 찍을 정도의 아름답고 무해하고 가슴이 풍만 등등의 피사체가 되어서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자리에 가든, 찍지 못하는 추녀의 자리도 여성이 정한 자리가 없다. 남성이 일방적으로 배분했지. 이것은 아주 오래된 여성 통제 방식이다. 낙인만 찍는 것이 아니다. 낙인만을 찍었다면 금세 전복되었을 것이다. 대신, 당근과 채찍이 끊임없이 제공된다. 상과 벌 효과를 주는 것이다. 통제할때는 이상화된 개념녀과 김치녀, 올바른 페미와 꼴페미를 나누는 것이다. 분할 통치를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여성은 정치적으로 연대가 힘들다. 자신이 받는 억압의 모순구조이기에 여성들을 이분법으로 범주화한다. 여성 혐오다. 미소지니를 여성 비하라고 하는데, 여성 숭배와 비하를 통해서 연대를 막고 이 사회를 뒤집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여성혐오다.
 
미녀이든 추녀이든 그 자리는 한번도 여성이 정한 적 없다. 그 자리는 언제까지 가는가에 대한 유통기한도 자기가 정한 것이 아니다. 개념녀가 한순간에 김치녀되는 것도 남성에 의한 것이다.



로타류 이미지 자체가 우리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아름답고 자유로운 자기애로 가득한 여성을 이해하는 유일한 재현체계라는 것이 문제다그점을 비판하는 것이다.

왜이렇게 강박적으로 이 이미지만 확대 재생산이 되는가?
 
내가 생각할 때 이렇게 입는게 제일 예쁘다~ 내가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조크든요라는 해시태그 운동이 있었지만 이는 왜 한시적으로 끝났을까?
 
대안적인 여성성 재현의 주체는 왜 적극적 매스미디어에서 다시 증폭하지 않고 사진가나 예술가들집단 안에서 실험적 행위나 재생산이 되는 유통 구조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가?
 
이미 욕망, 재현, 미감의방식이 남성중심적으로 개편되어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일시적이고 단발적 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이렇게 미감의 확장이라면 그렇게 확장됭 미감 안에서 하나의 선택지로 있기도 힘들 정도로 남성성을 가격하는 여성성의 모습은 확산되는 방식이 항상 제한된다.
 
그렇기 때문에, 로타류 이미지를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를 보수주의라고 비판할때의 보수의미를 보자.
 
보수는 기존의 질서를 강화하거나 기존질서가 약간 작동하는데 삐극덕 거리면 고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유지하고 보전하는 것이 보수다

로타류의 페니스 나르시시즘을 강화하는 그 장치, 남성의 욕망의 판 위에 편입된 채 그래도 남성이 준 여성이 취득할 수 없는 자유라는 가치를 오빠가 허락한 방식의 자유를 누리겠다는 행위, 판을 뒤집는 것을 생각조자 못하는 것, 내가 자발적이고 선택했다고 머무르는 것이야말로 보수적이다발본적으로 삽질해서 뒤집겠다라고 하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보수라는 개념부터 재정의 해야하는 것 아닌가? 오히려 이게 예쁘게 다가 아닌거 아닌가? 하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이 이미지 체계에서 아름다운 몸, 욕망할만한 몸은 거의 독점적인 특정한 몸이라고 표준화되어있다.
 
살빼는 것, 다이어트 완벽한 몸광고처럼 완벽한 몸을 보면서 지금을 덜된 몸으로 보는 것이 다이어트의 원리다. 그 다이어트 조차도 내가 원해서 자발적으로 한 것이라는 논리는 기존의 남성중심적인 판위에서 정신승리로 '이것이 자발적이야' 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수주의의 일환이다. 오히려 무모하게 대안도 없어보이고 답이 없는데도 로타류 이미지를 격렬히 비판하고 거기에 대한 격렬한 비판, 내가 원하는 것은그것이 아니다 라고 소리치고 구르고 쿵쾅되는 것이 가장 급진적인 것이다.
 
여러분이 여성 운동사에서 보는 서프러제트, 여성 참정권을 떠낸 여성들 대단하다라고 이야기하나 그당시에는 미친여자중 미친여자였다.서프러제트, 남편에게 이혼당하고 양육권 빼앗기고 사는 곳? 아무도 돌보지 않는 성당. 매우 추운 건물이었던 그곳에서 불을 지피면서 살아야했던 가장 미친여자들이 서프러제트였다.
 
저를 비롯한 페미니스트가 너무 사회에 반감 없는 방식으로 설득력도 완벽하고 어느누구도 기분나쁘게 하지 않는 것이라면 의심해봐야 한다. 가장 남근적인 방법을 옹호한다. 저는 학계에 있기 때문에 제가 갖고 있느 한계, 정제된 언어를 쓸 수밖에 없고 설득의 언어를 쓸수바껭 없다. 모든 페미는 , 그러나 이 전략을 쓸 필요가 없다.
 
15년 페미 포문을 연 것은 학계 페미가 아니었다. 이 헬조선이 그 뿌리깊은 여혐에 대해서 맨손으로 헤딩하고 맨손으로 싸운 그 급진적인 행위를 한 것은 페미니스트 대중들이었다. 어느 이론가도 예측 못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페미의 모습이 페미니즘의 모습이 단하나의 전략만을 써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양한 전략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것 자체를 성엄숙주의라고 이야기하는 화법에 말려드는 것 말로 남근중심을 보수해주는 시멘트칠해주는 것일 수 있다.
 
검열과 비판을 개념상으로 구분하지 못한 것이다. 검열은 소비 유통 단계에 오지도 못하고 그 전단계에서서 차단하는 것이다. 로타류 비판하는 페미는 한번도 검열의 권력을 가진적도 없다. 이 로타류 이미지가 왜 비판지점이 있는가 왜 이것이 증식하는가에 대해서 지적하는 것이다.
 
페니스 카르텔
 
지금까지는 페니스 나르시시즘이 남성 개인이 남성성을 구축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면 그 남성들은 어떻게 집단주의적인 정체성을 구성하는가를 분석해보도록 하자. 바로 그것을 페니스 카르텔이라고 한다. 페니스 파시즘이라고도 이야기한다.
 
페니스 파시즘은 2001년 개마고원에서 진중권 등이 공저한 책이기도 하다. 부산대 월장사태, 문단내 성폭력을 고발하는 내용의 책 이름이다. 그책의 내용을 조금 더 이론적으로 가져와서 분석을 해보고자 한다.
 
파시즘이라는 것 이야기 많이 들었을 것이다 전체주의로 번역되기도 한다. 개인이 체제와 동일시되는 상태, 개인의 특이성이 지워지고 자기의 판단 근거 존재 원리 존재 이유가 전체의 원리로 동일시되는 것이다. 더 이상 전체주의 개인은 개인으로서 남는 사적인 영역이 없다. 이것이 파시즘이다.
 
파시즘이라는 단어의 기원은 파시스fascis. 다발이라는 뜻이다. 이는 공무원들이 나무다발을 들고 다니던 것이 하나의 마패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페니스 파시스는 결국 남근 다발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남근 다발들이 그렇게 하나가 아니라 여러개 엮어야 한다는 것은 아까 그 페니스에 근간한 그 팔루스의 유약성과 비총체성과 유약성을 가리기 위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이 페니스 파시즘은 남성이 집단주의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방식에 대해서 더 자세히 보고자 한다면 강자와 승자로서의 정체성을 상호 확인하는 구조가 페니스 파시즘이다.
 
이 이야기는 무엇인가? 일단 남성들이 규범적인 남성이 되기 위해서 어떤 것이 강자이고 승자이자 전형적인 남성의ㅣ 몸인지에 대해서 공통의 이해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 항상 다른 남성성이라고 할 수 있는 전형적인 규범적인 남성성에 갖지 못하는 다른 것들을 착취와 폭력을 하며 무엇이 주류적 남성인가에 대한 경쟁뿐 마니라 서열이 있다는 것이다.
 
페니스파시즘의 흥미로운 점은, 강간문화다. rape culture
 
강간문화가 무엇인가?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 나의 선후배를 나의 일적인 파트너나 함께 교섭을 하고 의논을 하고 조율을 해야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성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사적 영역으로 관계를 변형시킬 수 있는 존재. 신체적 심리적이고 정신적으로 성적 착취가 가능한 존재로 여성을 보는 것이 강간문화다.
 
최근 헐리웃의 힘있는 제작자가 어떻게 영향력있고 부를 가진 대상인 여성을 포식한 일이 일어났다. 남성들이 서로 상호적으로 포식자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구조다. 왜 룸쌀롱을 다니는가? 내가 남자일뿐만 아니라 나뿐만 아니라 너도 성을 구매할 수 있다는 우리가 남성이라고 하는 연대의 고리, 일종의 매듭끈이 되는 것이다.
 
룸쌀롱 안가면 "니가 그렇게 깨끗하냐 선비냐 남자도 아니다" 라고 말한다. 진짜 남자라면 자신과 대비되는 여성의 몸을 착취하고 삽입하는 이 위치를 함꼐 공유해야만 페니스 카르텔을 계속 전승하는데, 거기에 딴지걸면 넌 진짜 남성이 아니야, 비아냥하며 남성 연대에서 열외를 한다. 별스러운 존재로 이야기한다. 진짜 남자는 통과의례로 이정도를 묵과해야한다, 서로가 서로를 간증하는 형식이다.
 
강자적 집단성으로 묶인 페니스 파시즘적으로 묶인 몸이 되는 것은 다른 몸의 집단을 대비적으로 만들어낸다. 지하철을 타던 제가 발견하였던 흥미로운 점은 남성들 사이에는 서열이 있다는 것이었다. 몸이 마르거나 거칠지 않거나 하면 그룹에서 기쎄다고 생각하는 남자애가 기가 약한 남성의 신체를 끊임없이 침범한다. 처음에는 볼꼬집고 어깨 걸치고 앉아있으면 허벅지 성기등을 터치한다. 끊임없는 신체 침범을 통해서 남성과 남성이라는 두 몸이 관계를 맺는다. 이런 폭력적인 몸의 관계, 거의 대부분 이성애적으로 한몸은 정복하고 다른 몸은 피격당하는 것이었는데 남성 그룹안에서도 가장 다수자의 포지션 가진 자가 가장 소수자의 몸을 가진 남성의 몸을 꾸준히 침범한다.
 
내가 이몸과 다른 관계를 가지려면 공격하는 자가 되고 상대는 피해, 수동자가 되는 방식으로만 몸이 접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방식 안에서도 끊임없이 내 몸이 어떤지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남성과의 그룹 안에서도 , 여성과 남성성의 대비와 같이, 제일 위에있는 사람과 그 아래 있는 남성사이의 또다른 위계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 위계안에서 침범당하고 모욕과 조롱 당하지 않으려면 더 강박적으로 더 공격적이고 더 방기하는 몸인 것을 과잉적으로 일종의 퍼포먼스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화된 몸이라는 것은 공격당할 수 있다는 점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페니스 - 구멍지어진 몸, 유동적 살
 
페니스는 정말 어떤 결핍도 없는 기관인가? 여성에 대한 혐오적인 발화에 대해서생각해보자. 영화관에서 서프러제트가 상영되었던 작년쯤 극장에서 남성이 여성을 폭행하면서 그 여성을 구멍 두 개라고 표현했다. 여성을 항상 구멍 그 이상 이하도 아니게 만드는 것, 남성이 채워야할 무엇인가로 보는 것이 드러나있다.

이때 구멍은 해부학적인 의미가 아니라 완벽하지 않다는 것 영원히 살 수 없는 존재, 의존적 존재, 오염될 수 있는 존재, 상처받을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 바로 구멍지어진 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남성의 몸은 구멍지어진 몸이 아닌가마치 남성은 자신의 몸에 어떤 구멍도 없는 것처럼 이야기 한다. 남성이 술을 마시고 맨바닥이나 지하철 벤치에서 잘수 있는 것? 내몸은 이렇게 방기해도 되는 것은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구멍이 없고 방기해도 된다는 것.
 
그런데 남성들은 외국에 나가면 그렇게 못한다는 것을 이미 안다. 나는 여기에서 방기할 수 없는 강자의 몸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내가 내국인 남성으로 나가서 방기할 수 있는 권력이 유학이나 어학연수만 해도 공격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남성의 몸은 구멍지어진 몸이다. 그렇다. 페니스 나르시시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남성의 페니스, 남근 다발이라고 하는 우뚝 솟은 것이 아니다. 이미 페니스는 사정기관과 배설기관이 일체화된 구멍이다

페니스는 사정기관과 배설기관이 일체되어있는데 이것이 흥미로운 이유는 무엇인가? 

일체되었을 때 소위말해 배설기간은 더러운 것, 사정기관은 아리스토텔레스조차도 정액이야말로 여성이 가진 난자의 일종의 물질성이라고 하는 규정되어있지 않은 경계 없는 물질에 일종의 질서를 부여하고 카오스에 경계를 부여해서 인간다운 형상을 부여하는 질서의 힘이 정액이라고 말한다. 그때 사정기관은 끊임없이 숭고한 것, 질서의 축이다. 그러나 아리스는 배설기관으로서의 페니스를 말한적이 없다.
 
더러운것과 깨끗한 것, 숭고한 것과 비천한 것, 질서와 무질서가 엉켜있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어떤 남성들은 여성에게 육변기, 걸레라고 이야기한다. 자신의 사정행위를 자신의 배설행위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나의 페니스를 배설기관인데 나의 사정이 일종의 배설이기 때문에 여성의 몸이 그것을 배출하는 화장실이라는 것이다이 오염의 가능성을 내가 아닌 타자의 여성의 몸에 니가 더럽다, 고 쏟아내는 것이다배설기관과 사정기관의 일체화라는 구조에서 자신의 정액의 방출과 배설행위가 구별이 어려울 때 여성의 몸을 타자화, 비천화를 통해 자신의 몸을 깨끗한 존재로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남성적인 것은 불안하다. 타자가 그 더러움을 다 전이하고 자신은 질서로 남는다. 나는 배설기관이 아니라 사정기관인 그 숭고한 것이라서 그래. 근데 여성은 항상 무언가 더러운 것이 담기는 것 순결성이 박탈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청결, 깨끗, 조심, 더럽지지 않도록 안감힘 다하는 것을여성의 책임으로 다 돌리는 것이다.
 
그런데 페니스 나르시시즘과 페니스 파시즘을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
 
남녀의 성차가 새겨진 해부학적 섹스의 모습이 아니라 어떤 것이 남성적인 성행위인가, 처녀성을 획득하는 자, 삽입하는 자라는 것 분만 아니라 남성적인 것이 무엇인가? 울지 않는 것 아무렇지 않은척 하는 등등의 젠더규범성 안에서 발생하는 권력의 효과가 바로 페니스라고 저는 본다. 이때 페니스는 해부학적 기관만을 말하지 않는다.

페니스 조차도 구멍지워진 일종의 완벽성의 장소, 자기충족적 장소가 아니라는 것. 뿐만 아니라 페니스는 살덩이이기 때문에 온도나 스트레스에 따라서 모양이 달라지는 살덩이라는 것이다 .마치 언제나 굳건한 무언가를 찌르는 공격하는 완벽한 상태로 있다는 것이 페니스가 가진 몸으로서의 페니스, 살로서의 페니스라는 것을 간과하는 것이다.
 
왜이렇게 살덩이로서의 페니스를 보지 않는가

정말 늘 흐물거리고 언제나 온도와 형태에 따라서 변화하는 유동성의 장으로 본다면 페니스 파시즘이 되려면 고체여야한다. 딱딱해져야 묶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액체나 계속 형태를 변하는 것을 어떻게 묶는가? 페니스 파시즘이라는 집단적인 남성 권력의 이 구조라고 하는 것이 우뚝 솟은 불변의 공격성, 법칙성으로만 본다면 페니스가 가진 유한성, 한계 구멍지워진 특성을 보지 못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른 남성성이 구성되는 방식, 페미니즘이 남성중심적 질서의 해체와 그에 대한 비판이 자리해야하는 지점은 여기라는 것이다. 이것이 유일한 남성의 모습인가? 라고 이야기하는 방식을 통해서 새로운 남성성이 구성되는 방식, 다른 남성성이 구성되는때 여성혐오가 결탁한다. 그것을 분석하는 것도 페미니즘이다. 저는 소위 남성과 비남성의 이분법을 찬성하지 않는다. 어떤 대안적인 구분법도 그렇게 지워지지 않는다.
  
남성과 비남성이라는 것은 여전히 남성을 표준화한다. 다른 모든 존재양식은 남성 바깥으로 밀려난다. 남성 존재론적 근간으로서의 그 뿌리를 흔드는 것이아니다. 여태까지 퀴어페미니즘이 너무 많은 경우 남성성 보다는 '여성성'을 해체하려고 했다. 사회 안에서 내가 왜 이렇게 힘들지? 내가 왜 차별받고 폭력의 대상이 되지? 하면 니가 힘이 없고 약해서 몰라서 그래, 부족해서 그렇다는 식의 지배강령은 지배받는 자를 스스로 혐오하게 한다. 여성이라고 하는 자리는 분명히 억압의 현실이 물질적으로 와닿는 자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성'이 억압의 현실이기만 하는가?
 
내가 핍박당한 것이 내가 여성이기 때문만인가? 내가 바로 이 피해입은 몸, 내가 바로 그 항상 자기 단속안에 갇혀있지만 결국 피해를당함에도 불구하고 발화하는 것은 너무 위험을 부담한다는 그 몸이라는 점을 폭로하는 것과 동시에 그동시에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것이다. 여성은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저항의 지점이 되기도 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라는 지표 안에 고정되어있지 않다

억압의 현실이자 변화하는 저항지점이고 고도화된 이론의 지점이다. 여성성이 해체되면 (지금 존재하는) 억압은 없는것이 된다. 여성도 없는데 여성에 대한 차별이 어딨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여성혐오라고 하는 논의 촉발당시 흥미로운 것이 두가지 있었다.
 
1) 전형적인 여성혐오주의자인 남성들은 혐오 아니라니까 여자 없으면 나 못살아 여자 너무 좋아’ : 혐오를 이해하지 못해서 혐오 없다고 하는 것이다. 혐오가 아니기 때문에 여성혐오는 안된다고 했다.
 
2) 다른 진영에서는 여성이 없기 때문에 여성혐오는 성립하지 못한다고 한다. 여성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그때의 여성은 억압받아 마땅한 착취당해 마땅한 그 열등성의 자리를 스스로가 갖고있는 남성이 지정한 열등성의 국면으로서 있는 여성이 없다는 말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항의 지점으로서의 여성마저도 부인했을 때, 그래 여성차별없어, 그런게 어딨어, 해버리는 것이다.
 
지금 페미니즘은 남성 특권구조에서 남성성을 꼬집어 내야한다.
 
트랜스 페미니즘 충분히 가능하다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여성이 끊임없이 이탈의 자리. 저항하고 감히, 대들고 저항하고 상상하고 욕망을 말하고 다르게 존재하기를 의미한다는 것 안에서 그 안에서 여성이라는 기표가 변형될 수 없다. 가만히 있어야하는 자리가 여성의 자리라고 사회에서 위치지어진 곳이다. 그런데 그 자리가 고정되어있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자리에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거다. 이미 변형과 분열 없이는 페미니즘이 없다.
 
더 이상 정체성이자 본질의 공간이 아니다. 그렇기 떄문에 페미니즘 공간 안에서 오히려 활발하게 가장 주유적인 남성성, 비주류 남성성을 왜 여성혐오에 복무하는가에 대해서 분석하고 다른 남성성들이 어떤 방식으로 여성을 혐오하는가에 대해서 가격하는 것이다.
 
남성 페미니스트의 역할

페니스 카르텔, 집단적으로 남성성이 형성되는 그 곳에서 내부고발자가 되어줘야한다. 아니오라고 말을 함으로써 균열의 목소리를 메아리처럼 더 많이 내줘야 한다. 그럼으로서 남성 페미도 함께 연대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제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의 과제는 특권구조에 있는 남성성의 해체와 분석이다.
 
 
*아래는 질의응답에 대한 러프한 요약

Q.  여성이 움직이고 분열되고 난 다음에 남는 것, 무엇이 남는가 

A. 여성성 들이 된다. 여성성들이라는 것, 남성성들이라는 것, 그렇게 생기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각 남성성 여성성들의 차이는 무엇인가? 복수적인 남성성 여성성들의 경합을 이야기한다면 그런 방식으로 충돌하는 방식으로 다각적으로 열려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Q. 한국적 남성성?

A. 식민적 남성성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식민지 시대 당시 주권이 빼앗겼기 때문에 동일시할 국가도 빼앗겼고 제2등 시민이었다. 1세계에서는 그런 인식이 없다. 한국 남성은 식민지 시절 항상 그 공적 영역에서조차 제2시민의 열등한 위치에있었다. 공적영역 사적 영역에 있을 때 사적영역에서 여성을 착취함으로써 자신이 축소되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한 것이다. 한국 문학은 로맨스라고 하지만 대부분 강간이다. 자신을 확인하는 또다른 방식으로 여성의몸을 식민지화 한 것이다.
 
Q. 남성 페미 역할
A. 남성 여성 페미는 역할이 다를 수 있다. 가서 남성 카르텔에 균열을 내는 내부고발자가 되어달라. 다만 당사자의 발언권을 너무 차지하지 마라.
 
Q.퀴어와의 갈등에 대해서?
A. 각각의 소수자 운동은 자신들이 가격하고자 하는 주요 모순구조가 다르다. 페미니즘은 남성에 의한 착취구조다 그 젠더구조를 바꾸겠다는 것인데 트랜스의 입장에서는 젠더이론 자체가 강자라는 것이다. 존재 자체가 강자라는 것이다. 존재 질서 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차별이 이 사회의 근간이 되는 차별이라고 하는 것이데, 이론적인 경합이나 충돌이 있다고 본다

저는 이 충돌이 존재하는 이유는 각각의 소수자 운동이 원인을 진단하는 것이 다를 수 있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혐오를 퍼붓고 있다고 할 때, 트랜스 젠더리즘이라고 하는 이 페미니즘은 서로가 서로에게 참조점이 될 수 있다. 서로 경합할 수도 있듯이..
 
위계 질서가 다 해체되면 그다음에 뭐가 오는가? 아니면 트랜스 젠더리즘과 같이 젠더가 엄청 많이 있다고 이야기하듯이 젠더 분사와 방사라고 하는 것이 정말 젠더 체제 해체인가, 양적 증가에 대한 강화인가에 대해서 계속 이론적인 경합이 가능하다고 본다. 정말 주요 모순 구조를 파악하는데서로 다르다. 막시즘과 페미니즘이 다르듯이 소수자 운동에서도 전혀 다르게 파악될 수 있는데 서로 가지고 있는 나의 소수자성안에 있는 다수자성에 대한 비판으로 이론적인 경합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페미니즘 우산 안에 반드시 모든 소수자가 다 들어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1980년대 70년대에는 노동운동이 모든 운동을 집어 삼켰었다. 그때 모든 운동은 다 노동해방운동이다 페미니즘은 총체적 해방이 아니라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것이었다.. 그때 여성운동하면 손가락질 받았다. 뭐가 문제인지 모른다고 손가락질 한 것이다

페미니즘이 모든 소수자 운동이 모든 소수자 운동의 가장 위에있다고 보는 것이다. 예전에는 다 분화되어있었던 것이 페미니즘안에 들어오기 위해서 내의제가 더 먼저다 하는 방식으로 머리채를 잡는 경우가 생긴다. 중요하지 않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퇴행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수자 운동은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그 풍토의 기반이 비옥하려면 자기의 위치성, 차별을 보는 민감성의 언어가 더 다양해지고 다각회되어 다각도로 가겨하는 것이 이사회의 소수자 덩치들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단하나의 이름으로 그 안에 들어와서 그 차이의 인식 지도로 하나로 뭉그러뜨리는 것이 가장 게으른 것 아닌가 하는 것이다. 또하나 이야기하고싶은 것으 주요 모순구조가 서로 달라서 이론 경합이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대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문제다.
 
연대를 할 수 있다는 것과 주요 모순의 의제를 트렌스 젠더즘과 성소수자가 다른 것을 본다는 그 차이를 인정해야한다는 것이다. 그것 자체로 우리가 연대를 못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페미니즘적 의제가 더 이상 페미니즘적이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쉽지 않다.
 
Q. 페미니스트이면서 퀴어 정체성을 가진 자는? 그럼 어떻게 해야하는가? 급진 페미쪽에 있는 퀴어들은? 양자택일해야하는가? 급진페미하는 귀어는 양자택일해야하는가

A. 이미 페미니즘이 교차성 페미다. 여성의 노동환경을 의미할때 정규직 비정규직을 말해야한다. 여성의 임신중단권을 이야기 할때 재생산권 등등에 대해서 이야기해야한다. 

퀴어판에 있는 남성중심성 때문에 비판이 안되는 성역이 있다. 왜 여성의 퀴어성이 남성의 퀴어성보다 더 비가시화되는가, 또다른 소수자성 안의 차이 사이에대해서 이야기하면 곧바로 퀴어 혐오가 되어서 입도 못열게 된다. 급진 페미는 교차성 페미의 언어이고 그렇기 때문에 민감하기도 하는 것다. 정말 잘라지는, 매끈하게 여성만이 떨어져나오는 그런 의제는 없다.

Q. 미러링 너무 과도하지 않나?
A. 미러링은 원본을 폭로하는 것. 어디에있는지 그 위치성을 폭로하는 것이다. 미러링이 원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해석에 역량을 투여해봐야 미러링에 대한 판단이 가능하다. 원본의 언어의 잔혹성에 대해서 드러내는 것을 보자. 원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 난 다음에 그것의 효과와 한계에 대해서 이야기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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