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20 수정중)
작성자 : 김성희
* 자율성 학파 블로그에 게시된 내용은 자유롭게 복사하거나 퍼가실 수 있습니다만 자율성학파의 출처를 명확히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내용을 임의로 수정하거나 편집하지 마시고 필요시 관리자 (autonomyschool@gmail.com) 와 상의해주시기 바랍니다.
[포럼] 유민석, 오찬호 참여사회포럼 : 대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혐오에는 혐오?>
작성자 : 김성희
* 자율성 학파 블로그에 게시된 내용은 자유롭게 복사하거나 퍼가실 수 있습니다만 자율성학파의 출처를 명확히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내용을 임의로 수정하거나 편집하지 마시고 필요시 관리자 (autonomyschool@gmail.com) 와 상의해주시기 바랍니다.
혐오발언에 대항하기 – 유민석 (혐오발언 역자)
간단 이력 소개 : 랭턴과 버틀러를 대립시켜 비교하는 연구를 했고, 혐오발언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 차에 이 주제가 재미있어서 번역을 하게 되었다. 언어 철학적인 이야기도 나왔다. 개인적으로 고생도 많이 했다. 1997년도 책.
책의 맥락 : 미국에서 90년대 초반에 이런 혐오문제가 대두가 되었었다. 그래서 여성에 대한 성희롱이나 포르노그래피에의 폭력성, 인종차별에 대해서 이것이 뜨거웠던 시기였다. 그때 이런 문제들이 제기되었던 집단들이 있었다. 물론 페미니스트들이 많은 문제를 제기했었고, 인종차별에 반대하려는 유색인 학자들이 이런 문제를 끄집어냈고 공론화를 했다. 특히 매키넌이 성희롱이나 포르노그래피 정의를 하고 학술적으로 연구했던 페미니스트 이론가가 있었다. 성희롱 규제 법안도 만들자는 제안을 했고 일부 성공도 시켰다. 국가는 중립을 시켜야 하고 개인들의 표현의 자유는 보장해야 한다는 인식이 아주 강했고, 표현의 자유가 공감대를 가지는 가치라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페미니스트들이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책의 맥락 : 미국에서 90년대 초반에 이런 혐오문제가 대두가 되었었다. 그래서 여성에 대한 성희롱이나 포르노그래피에의 폭력성, 인종차별에 대해서 이것이 뜨거웠던 시기였다. 그때 이런 문제들이 제기되었던 집단들이 있었다. 물론 페미니스트들이 많은 문제를 제기했었고, 인종차별에 반대하려는 유색인 학자들이 이런 문제를 끄집어냈고 공론화를 했다. 특히 매키넌이 성희롱이나 포르노그래피 정의를 하고 학술적으로 연구했던 페미니스트 이론가가 있었다. 성희롱 규제 법안도 만들자는 제안을 했고 일부 성공도 시켰다. 국가는 중립을 시켜야 하고 개인들의 표현의 자유는 보장해야 한다는 인식이 아주 강했고, 표현의 자유가 공감대를 가지는 가치라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페미니스트들이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매키넌의 93년도 <only words,> 라는 책이 있다. 그냥 말뿐인데 뭐, 하는 뜻. '성희롱? 그냥 그거 말 아니야?' '네가 피해의식 있는 거 아니야?' '너 말을 어떻게 알아?' 하는 등의 반응을 꼬집었다. '포르노 그냥 그거 사진인데 뭐?'하는 현실을 꼬집기 위해서 지은 책이었다. 이는 폭력 행위라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이는 표현이 아니라 행위 쪽에 초점을 두었다. 미국은 표현의 자유가 굉장히 강하기 때문에, 이것을 표현에서 빼버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인종차별 반대 이론가들도 인종혐오 발언이 얼마나 당사자에게 상처를 주고 폭력적인지를 부각하려고 마리 제이 마츠다 같은 재일 미국인(아시아계 여성)이 자신의 경험과 법학적 배경을 가지고 인종차별 발언에 대해서 규제를 하자는 의도로 상처를 주는 말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이것이 모두 90년대 초반에 일어났던 일들이었다.
개인 살상용으로 훈련된 개한테 사람을 죽이라고 하면 죽일 것이다. 이 경우 그 명령을 내린 사람이 자신은 직접 죽인 것은 아니다. 죽이라고 말을 했을 뿐이다. 그렇게 책임을 피해갈 수 있다. 그런데 이는 교살 행위고 마찬가지로 이는 실질적 폭력을 가져온다는 이야기를 했다. 마츠다는 언어적인 따귀라고 표현할 정도 수신자의 복부를 강타하는 등의 물리적 폭력과 같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논란이 되었다. 미국에서는 특히 일부 철학자들은 이것이 말이 안 된다고 했다. 언어가 사람을 강타하고 하는 것은 철학적으로 앞뒤가 안 맞는다. 철학적으로 정합적이지 않다는 반박이 나오기도 했다. (드워킨) 그런데 여기에 반박하면서 랭턴이라는 페미니스트 언어분석 철학자가 있었고, 그 사람이 매키넌이나 마츠다의 이야기를 옹호하기 위한 철학적 정당화를 하게 된다. 그때 끌어 들여온 이론적 배경이 언어철학 중 하나 분야인 언어 행위이론이었다. 언어가 사태를 복구하는 중립적 도구가 아니라,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하고 있는 행위다. 이는 화용론이라고 하기도 하고 언어 행위이론이라고도 하는 언어 철학적 입장이다.
이는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언어철학자가 초기에 주장한 관점이기도 하다. 친구 집에 놀러 가서 늦게까지 있으면, 친구네 어머니가 ‘밤이 늦었구나’ 하는 말을 하면 정말 밤이 늦었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고, 실제로는 내면에는 집에 가라는 이야기가 있다. 속에 그런 것이 있고 일종의 암시를 전달한다. 이렇게 언어를 사용할 때 맥락에서 어떤 행위를 하기도 한다고 본 것이다. 다른 예시로는 엄마가 아이를 동물원에 데려가서 저게 호랑이라고 이야기를 하면, 호랑이라고 알려주는 정보전달의 역할이지만, 산에서 호랑이를 만나면 ‘호랑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빨리 도망가라는 말이 된다. 언어가 어떤 맥락에서 실제 사용된다는 이야기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제기를 했고, 제일 오스틴은 영국에서 더 세세하게 이를 나누어 진술 문과 수행문을 구분을 하게 된다. 많이 알려진 이야기 이긴 하는데 진술문은 여기 커피가 있다고 하는 것인데, 수행문은 ‘불이야’라는 말이 불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도망가라는 말이다. <-실제로 행위를 하는 것. 그래서 여성주의자나 인종차별 반대 이론가들이 혐오 발언이 수행문이고, 행위라고 정당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이론은 가져다 쓰면서 랭턴은 집중적으로 오스틴의 개념을 가져와서 혐오 발언을 분석하게 된다. 혐오 발언이 실제로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지를 계속 집중적으로 연구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혐오 발언이 하는 행위가 몇 가지가 있는데, 이를 말이 아니라 행위라고 본다면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선동 효과가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서 '유태인들이 아이를 납치한다더라', '조선인들이 독을 퍼트린다더라', '에이즈를 동성애자들이 퍼트린다더라' 하는 것이 선동이다. 이는 선동이면서도 동시에 피해자에게 직접적으로 공격하기 위해서 쓰는 글이다. 세밀하게 랭턴은 이를 분석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혐오는 세 가지 층위로 기능한다. 첫 번째는 피해집단에 열등하게 등급을 매긴다(ranking)는 행위를 지적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동성애가 사실상 정신병이라고 말하면 이성애자보다 동성애자를 열등하게 만든다. '안나는 낮은 아이큐가 있어' 라고 말한다면 안나의 지적 능력을 다른 학생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판정을 매긴다. 두 번째로는 차별을 정당화하는 기능이다. 예를 들어 '김치녀는 삼일에 한 번씩 패야 된다'는 이야기는 여성에 대한 폭력 행위를 정당화하게 된다. 차별을 옹호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직접적으로 권리와 권력을 박탈하는depriving의 힘이 있다는 점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어떤 발언을 했을 때 이 단순한 말이 자신의 견해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법적이고 권력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어서 실제로 권력을 박탈하게 된다.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넌 해고야' 하고 말한다면 노동자의 권리가 박탈되는, 세계에 영향력을 미친다는 점이다. 이렇게 혐오 발언에는 세 가지 층위가 있다. 이 세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때 랭턴은 subordinating 열등한 계급으로 종속시키는 역할을 혐오 발언이 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혐오 발언이 단순히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이런 식으로 피해자의 정치적이거나 사회적 지위마저도 좌우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이 있다고 설명을 한 것이다.
예를 들어 혐오 발언이 하는 행위가 몇 가지가 있는데, 이를 말이 아니라 행위라고 본다면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선동 효과가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서 '유태인들이 아이를 납치한다더라', '조선인들이 독을 퍼트린다더라', '에이즈를 동성애자들이 퍼트린다더라' 하는 것이 선동이다. 이는 선동이면서도 동시에 피해자에게 직접적으로 공격하기 위해서 쓰는 글이다. 세밀하게 랭턴은 이를 분석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혐오는 세 가지 층위로 기능한다. 첫 번째는 피해집단에 열등하게 등급을 매긴다(ranking)는 행위를 지적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동성애가 사실상 정신병이라고 말하면 이성애자보다 동성애자를 열등하게 만든다. '안나는 낮은 아이큐가 있어' 라고 말한다면 안나의 지적 능력을 다른 학생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판정을 매긴다. 두 번째로는 차별을 정당화하는 기능이다. 예를 들어 '김치녀는 삼일에 한 번씩 패야 된다'는 이야기는 여성에 대한 폭력 행위를 정당화하게 된다. 차별을 옹호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직접적으로 권리와 권력을 박탈하는depriving의 힘이 있다는 점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어떤 발언을 했을 때 이 단순한 말이 자신의 견해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법적이고 권력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어서 실제로 권력을 박탈하게 된다.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넌 해고야' 하고 말한다면 노동자의 권리가 박탈되는, 세계에 영향력을 미친다는 점이다. 이렇게 혐오 발언에는 세 가지 층위가 있다. 이 세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때 랭턴은 subordinating 열등한 계급으로 종속시키는 역할을 혐오 발언이 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혐오 발언이 단순히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이런 식으로 피해자의 정치적이거나 사회적 지위마저도 좌우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이 있다고 설명을 한 것이다.
또 혐오 발언의 또 다른 특징이 있는데, 피해자들을 침묵시킨다는 것이다. 말이 어떻게 침묵시키지? 하는 생각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 방식은 예를 들어서 판사가 법정에서 ‘조용히 하세요’라고 말을 하면 그 즉시 조용해진다.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혐오 발언이 한다. 혐오 발언이 피해자들을 침묵시킨다는 주장은 매우 유명하다. 혐오 발언이 침묵이라는 키워드와도 이렇게 연관이 되는 것이다. 야 이 호모 새끼야 라고 하면 듣는 사람은 저항이 힘들고 침묵을 하게 된다. 침묵은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뉠 수 있다. 사회적 약자의 언어가 혐오 발언의 피해집단의 발화가 어떻게 박탈당하는지를 분석한 것이다. 오스틴 같은 경우 ‘진술문과 수행문’을 주장했는데, 그 이후에는 진술문과 수행문이 구별되지 않는 경우도 생겼다. 커피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커피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커피가 있다는 것을 내가 믿는다는 것이 교차하는 등의 경우가 그렇다.
세 가지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발화행위, 발화수반행위, 발화 효과 행위 이렇게 세 가지다. 발화행위는 진술문과 마찬가지로 그냥 말하는 행위다. 예를 들어 '자 이런 김치녀라는 말이 있습니다.’ 라고 강연을 하면 발화행위를 했지만 혐오 발언을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단어를 가지고 실제로 어떤 여성을 모욕하기 위해 쓰는 것은 발화수반행위다. 발화행위의 사용이고, 처음에 말했던 수행문에 해당하는 것이다. (밤이 늦었구나, 하는 말은 밤이 늦었다고 알려주는 발화행위가 아니라 집에 가라는 발화수반행위인 것처럼) 발화 효과 행위는 듣고 난 청자의 감정과 같은 이후의 결과를 말한다. 밤이 늦었다,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집에 가려고 짐을 싸는 등의 사후적으로 벌어지는 효과라고 볼 수 있다. 랭턴은 이 오스틴의 세 가지 개념을 가지고 침묵을 분석한다. 혐오랑 연관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언어가 권력과도 연관이 있다고 본다면, 랭턴은 외연을 좀 더 확장해서 설명한다.
발화 행위적 재갈이라는 침묵이 있다. 한마디로 그 사람을 독방에 가둔다거나 재갈을 물리는 등의 침묵이 있다. 발화 효과 행위적 좌절이 있다. 말은 하지만 상대방이 들어주지 않아 침묵이 발생하는 것이다. 말을 하지만 듣지 않는 침묵이다. 여성이 성폭행 사건을 증언하지만, 이런 일을 증언할 때 그런 일은 없어, 네가 피해의식이 있어서, 등의 말이 화자의 의도가 좌절되는 것이다. 정부에 항의하지만 정부가 들어주지 않는다던가, 파티에 친구가 초대했는데 안 온다든가 하는 상황이다. 여성들이 성차별 이야기를 하면, '너 메갈이지', '성차별이 어딨어' 하는 등의 것들이 좌절의 사례다. 발화수단 행위적 좌절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슬프다. 아예 제도나 관습이 존재하지 않아서 해당 발화를 할 수 없는 상태다. 예를 들어서 여성들은 남고생을 따먹고 싶다는 이야기를 못 한다. 동성애자는 이성애자한테 너는 이성애자들에게 넌 언제부터 이성애자였니? 하는 이야기를 못 묻는다. 그렇게 물을 만한 권력이 없기 때문이다. 주인은 노예에게 물을 떠 오라고 할 수 있지만, 노예는 주인에게 가서 물 좀 떠오라고 할 수 없다. 권력관계의 비대칭 때문에 권력 가진 집단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지만, 권력 없는 집단은 그렇지 못하다. 논문 제목이 그래서 ‘발화 행위와 발화 불가능한 행위’가 논문의 제목이었다.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나 동성애자는 언어가 없다, 언어적 권력을 박탈당했다, 등의 주장을 하면서 언어철학을 통해서 논쟁적으로 이야기했던 것이다. 비슷하게 매키넌은 남성의 표현의 자유는 여성의 표현의 자유를 침묵시킨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혐오 발언 자체가 폭력이자 불평등, 차별행위로 간주해서 법으로 규제하자고 이야기를 하게 되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다. 이런 논의가 있고 나서, 오늘 버틀러가 4년 뒤에 이런 논의에 딴지를 걸면서 다른 주장을 내놓게 된 것이다. 듣기에는 상처를 주고 열등한 계급으로 만들기도 하는데 왜 여기에 딴지를 걸까? 이렇게 의문이 들 수는 있지만 들어보면 다르다.
세 가지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발화행위, 발화수반행위, 발화 효과 행위 이렇게 세 가지다. 발화행위는 진술문과 마찬가지로 그냥 말하는 행위다. 예를 들어 '자 이런 김치녀라는 말이 있습니다.’ 라고 강연을 하면 발화행위를 했지만 혐오 발언을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단어를 가지고 실제로 어떤 여성을 모욕하기 위해 쓰는 것은 발화수반행위다. 발화행위의 사용이고, 처음에 말했던 수행문에 해당하는 것이다. (밤이 늦었구나, 하는 말은 밤이 늦었다고 알려주는 발화행위가 아니라 집에 가라는 발화수반행위인 것처럼) 발화 효과 행위는 듣고 난 청자의 감정과 같은 이후의 결과를 말한다. 밤이 늦었다,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집에 가려고 짐을 싸는 등의 사후적으로 벌어지는 효과라고 볼 수 있다. 랭턴은 이 오스틴의 세 가지 개념을 가지고 침묵을 분석한다. 혐오랑 연관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언어가 권력과도 연관이 있다고 본다면, 랭턴은 외연을 좀 더 확장해서 설명한다.
발화 행위적 재갈이라는 침묵이 있다. 한마디로 그 사람을 독방에 가둔다거나 재갈을 물리는 등의 침묵이 있다. 발화 효과 행위적 좌절이 있다. 말은 하지만 상대방이 들어주지 않아 침묵이 발생하는 것이다. 말을 하지만 듣지 않는 침묵이다. 여성이 성폭행 사건을 증언하지만, 이런 일을 증언할 때 그런 일은 없어, 네가 피해의식이 있어서, 등의 말이 화자의 의도가 좌절되는 것이다. 정부에 항의하지만 정부가 들어주지 않는다던가, 파티에 친구가 초대했는데 안 온다든가 하는 상황이다. 여성들이 성차별 이야기를 하면, '너 메갈이지', '성차별이 어딨어' 하는 등의 것들이 좌절의 사례다. 발화수단 행위적 좌절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슬프다. 아예 제도나 관습이 존재하지 않아서 해당 발화를 할 수 없는 상태다. 예를 들어서 여성들은 남고생을 따먹고 싶다는 이야기를 못 한다. 동성애자는 이성애자한테 너는 이성애자들에게 넌 언제부터 이성애자였니? 하는 이야기를 못 묻는다. 그렇게 물을 만한 권력이 없기 때문이다. 주인은 노예에게 물을 떠 오라고 할 수 있지만, 노예는 주인에게 가서 물 좀 떠오라고 할 수 없다. 권력관계의 비대칭 때문에 권력 가진 집단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지만, 권력 없는 집단은 그렇지 못하다. 논문 제목이 그래서 ‘발화 행위와 발화 불가능한 행위’가 논문의 제목이었다.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나 동성애자는 언어가 없다, 언어적 권력을 박탈당했다, 등의 주장을 하면서 언어철학을 통해서 논쟁적으로 이야기했던 것이다. 비슷하게 매키넌은 남성의 표현의 자유는 여성의 표현의 자유를 침묵시킨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혐오 발언 자체가 폭력이자 불평등, 차별행위로 간주해서 법으로 규제하자고 이야기를 하게 되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다. 이런 논의가 있고 나서, 오늘 버틀러가 4년 뒤에 이런 논의에 딴지를 걸면서 다른 주장을 내놓게 된 것이다. 듣기에는 상처를 주고 열등한 계급으로 만들기도 하는데 왜 여기에 딴지를 걸까? 이렇게 의문이 들 수는 있지만 들어보면 다르다.
혐오 발언의 힘이 그 자체로 막강하지 않다고 보는 것 같다. 언어의 의미나 그런 것들은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불안정하고 시대나 역사가 바뀌면 바뀐다. 의미 자체가 불안정하고 맥락에 고정되어있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버틀러의 예시로는 퀴어라는 단어가 처음에 미국에서는 동성애자들을 수치심을 주려고 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이 말을 동성애자 퀴어 운동가들이 이를 자기 긍정의 언어로 전복시켰다. 퀴어라는 용어를 혐오 발언이 아니라 이제는 자기의 퀴어 정체성을 나타내는 자부심과 긍정의 의미로 바꿔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운동이 호응을 얻으며 퀴어라는 말의 의미가 변했다. 버틀러는 이 용어를 보듯이 이런 가치가 바뀌고 이런 것을 보면 의미가 정해진 것은 아니고 항상 이탈될 수도 있고, 다른 효과를 발생시킬 수도 있고, 따라서 혐오 발언이 이렇게 부정적인 역할만 볼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또 미러링의 이야기도 나올 수 있다. 그들은 혐오 발언을 사용보다는 언급하고 전시한 역할이다. 혐오 발언에 대한 위악적인 재현인 것이다. 예) 남성이 성폭행당한 기사가 있다면 거기에 달리는 댓글에 네가 짧게 입고 다녀서 그런 거 아니냐, 남자인 네가 꼬리 쳤겠지, 네 말을 어떻게 믿어 하는 등의 말을 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는 있겠지만, 피해자 비난하기라는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공격을 패러디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버틀러는 혐오 발언에 대한 위악적 종류의 담론적인 성찰 ~이다. 언어적 전시이다. 그때의 혐오 발언은 이런 발언이 그동안 여성들에게 가해졌다는 것이 역지사지로 보여줄 수 있는 역할을 하므로 이때는 혐오 발언의 직접적인 사용과는 다르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마츠다와 랭턴은 혐오 발언에 대한 이와 같은 다른 방식의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된다.
혐오 발언의 권력이 막강한 것이 아니라 랭턴처럼 혐오 발언자를 강력한 발언자를 상정하지만, 버틀러는 그것도 틀렸다고 이야기한다. 랭턴이나 마츠다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신의 언어처럼 태초에 말씀이 있었느니라~ 빛이 있어라~ 하면 세계가 빛이 생기는 등의 식으로 세계를 그렸고, 피해자의 사회적 지위를 좌우할 만큼의 힘으로 간주했던 것은 잘못되었다, 일상적으로 평범한 화자일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일베로 고소해서 잡아보면 권력도 없고 그런 경우가 많으므로 이런 이야기도 한다. 이샤니 마이트라는 똑같은 페미니스트 언어철학자도 랭턴에게 반례를 제시하면서 지하철에서 아랍 여성이 탔는데 나이든 노인이 ‘X 같은 테러리스트야 너희 나라로 돌아가'하고 말할 때, 혐오발화자가 힘이 없는 노인이기 때문에 이를 어떻게 권력자라고 볼 수 있겠냐, 그리고 혐오발언자가 누군지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으므로, 쓴 사람이 누군지 성별이나 나이나 사회적 지위가 없이도 작동되기 때문에 혐오발화가 권력관계에서 강자라고 보기 힘들다고 이야기했다. 혐오 발언의 힘은 개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이 혐오 발언이 가능하게 하여주는 사회의 관습이나 이데올로기가 누적되어왔기 때문에 이러한 발언이 힘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렇게 다르게 설명을 한다.
국가 규제에 대해서도 반대를 많이 한다. 혐오 발언의 폭력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국가 규제를 강조하는데, 버틀러는 여기에 반대한다. 혐오 발언을 규제하자고 했을 때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반드시 소수자 집단에 유리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혐오 발언 규제 법안이 실질적으로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편파적으로 소수자에게 적용되는 실례가 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혐오 발언 처벌하자고 했던 대학의 규정이 인종차별을 금지하자 처벌된 사례가 전부 다 흑인들을 처벌했다. 또, 동성애자들의 표현을 외설로 간주해 처벌한다거나, 에로틱한 것으로 표현한 것을 다 외설로 규제한다든가, 흑인의 랩 가사가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저것이 언어폭력이라고 규제하는 것은 흑인들의 애환을 담을 수 있는 하위문화를 억압하는 도구로 쓰이기도 한다. 여기서 국가규제는 소수자에게 굉장히 불리하게 적용되어왔다는 점을 들어 여기에 반대하는 것이다. 국가가 편파적으로 A는 맞는데 B는 아니야 하는 식으로 혐오 발언을 정의할 수 있는 권력을 가져가면 운동으로 저항할 여지도 없어지게 된다. 예를 들어서 '김치년은 혐오 발언이 아닌데 김치남이 혐오 발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굉장히 이상하고, '일베는 표현의 자유인데 메갈은 혐오 발언이야' 라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편파적인 판정의 실례다. 그래서 버틀러는 그런 것들에 반대를 하고, 버틀러는 해법으로 말대꾸를 강조한다. 피해당사자들이 혐오 발언에 대해서 되받아쳐서 말하고 그것을 통해서 말하고 기생적으로 말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한마디로 메갈의 미러링의 방식으로 말하기를 주장하는 것이다. 화자의 취약한 점을 되받아쳐서 말대꾸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발화 효과 행위의 특성은 화자가 예측할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김치녀의 발화자의 의도는 이 말을 하면 수치스럽게 만들고 피해자가 저는 개념녀예요 하고 변명하길 원하고 침묵시키고 싶어 하는 목표를 가지고 발언을 할 텐데 피해자가 이를 '응 맞아 난 김치녀야 어쩌라고’, 혹은 '응 나 김치녀가 희망 사항이야' 라고 말한다면 화자가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되받아쳐 말하기를 청자가 한 것이다. 그때는 화자가 침묵 당하고 화자의 목표가 좌절되는 것이다.
국가 규제에 대해서도 반대를 많이 한다. 혐오 발언의 폭력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국가 규제를 강조하는데, 버틀러는 여기에 반대한다. 혐오 발언을 규제하자고 했을 때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반드시 소수자 집단에 유리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혐오 발언 규제 법안이 실질적으로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편파적으로 소수자에게 적용되는 실례가 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혐오 발언 처벌하자고 했던 대학의 규정이 인종차별을 금지하자 처벌된 사례가 전부 다 흑인들을 처벌했다. 또, 동성애자들의 표현을 외설로 간주해 처벌한다거나, 에로틱한 것으로 표현한 것을 다 외설로 규제한다든가, 흑인의 랩 가사가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저것이 언어폭력이라고 규제하는 것은 흑인들의 애환을 담을 수 있는 하위문화를 억압하는 도구로 쓰이기도 한다. 여기서 국가규제는 소수자에게 굉장히 불리하게 적용되어왔다는 점을 들어 여기에 반대하는 것이다. 국가가 편파적으로 A는 맞는데 B는 아니야 하는 식으로 혐오 발언을 정의할 수 있는 권력을 가져가면 운동으로 저항할 여지도 없어지게 된다. 예를 들어서 '김치년은 혐오 발언이 아닌데 김치남이 혐오 발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굉장히 이상하고, '일베는 표현의 자유인데 메갈은 혐오 발언이야' 라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편파적인 판정의 실례다. 그래서 버틀러는 그런 것들에 반대를 하고, 버틀러는 해법으로 말대꾸를 강조한다. 피해당사자들이 혐오 발언에 대해서 되받아쳐서 말하고 그것을 통해서 말하고 기생적으로 말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한마디로 메갈의 미러링의 방식으로 말하기를 주장하는 것이다. 화자의 취약한 점을 되받아쳐서 말대꾸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발화 효과 행위의 특성은 화자가 예측할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김치녀의 발화자의 의도는 이 말을 하면 수치스럽게 만들고 피해자가 저는 개념녀예요 하고 변명하길 원하고 침묵시키고 싶어 하는 목표를 가지고 발언을 할 텐데 피해자가 이를 '응 맞아 난 김치녀야 어쩌라고’, 혹은 '응 나 김치녀가 희망 사항이야' 라고 말한다면 화자가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되받아쳐 말하기를 청자가 한 것이다. 그때는 화자가 침묵 당하고 화자의 목표가 좌절되는 것이다.
또 퀴어라는 욕설이 긍정적으로 변모된 것은, 아무리 퀴어를 가지고 욕설을 하고 싶어도 긍정적으로 욕설이 변했기 때문에 화자가 그것을 통해서 모욕할 수 없게 되고 역으로 화자가 침묵하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역설적으로 침묵시킬 방법이 있다고 이야기함으로써 되받아쳐 말하기가 해법이 된다고 말한 것이다. 혐오발화자들 몇몇을 처벌해서 입을 틀어막는 것은, 혐오 발언이 그대로 작동하고 화자만 처벌받는 것이기에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그래서 혐오 발언을 재의미화하는 경우에는 혐오발화를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관습 자체인 관습 자체를 전복하기에 근본적인 해법으로 말을 한 것이다. 캐서린 게이바라는 사람도 책 제목 자체가 ‘말대꾸’이다. 겔버는 랭턴의 주장도 인정한다. 혐오 발언이 피해자들을 공론장에서 발화 불가능하게 침묵시키는 역할도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버틀러적인 테제도 강조한다. 그러므로 되받아쳐 말하기를 긍정한다. 말대꾸 정책을 이야기한 것이다. 대부분의 혐오 발언의 대응책은 주로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고 규제 중심으로 가는데, 피해 당사자가 이야기할 수 있도록 교육적 물질적 자원을 주는 것이 규제를 강화하지 않으면서도 피해자를 도울 수 있으므로 국가가 나서서 말대꾸를 제도적으로 지원해줘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한국에서는 힘들 것 같다. 메갈리아의 미러링을 국가가 지원해주겠냐? 하는 담론이 일 것이다.
혐오 발언이 발생했을 때, 유태인에 대한 인종적인 혐오가 있었다, 그러면 그 다음에 방송이나 그런 곳을 통해서 나치 학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방송해준다거나, 지역 신문에 피해 당사자들의 발화를 실을 수 있는 것을 제도적으로 지원해주는 방안이 있다. 버틀러도 겔버도 공론장을 통해서 피해 당사자들의 연대를 통한 발화가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 같다. 혐오 발화자를 역으로 침묵시킬 수 있는 방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겔버는 말대꾸의 사례를, 방식을 좀 설명해준다. 혐오 발언을 이런 식으로 우리는 대응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너는 바보야 너는 멍청해 하고 말하면 세 가지 방안의 대처방안이 있다. 첫 번째는 사실성에 따라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대상 세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나는 어떤 성과를 냈고 어디서 일등을 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즉 팩트폭력을 하는 것이다. 팩트로 반박을 하는 거. 두 번째로는 정당성을 통한 말대꾸다. 규범을 이용한 것이다. 너는 나에게 이렇게 말할 권리가 없다고 반박하는 것이다. 진실성은 화자의 내면세계가 갖고 있는 진실성에 호소하는 것이다. ‘나는 네가 나에 대해서 그렇게 정말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호소다. 이런 식으로 말대꾸를 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의사소통행위이론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이다.
실제로 혐오 발언 현장에서 폭력적일 수도 있는 상황에서 개인이 나서서 말대꾸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게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도 있다. 그래서 랭턴을 비판하는 슈말처가 ‘말대꾸가 쉬운 줄 아냐 이는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맞는 비판 같다. 버틀러도 당장 개인이 말대꾸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공동체 연대를 통한 말대꾸를 이야기했을 것 같다. 그런데 실제로 성폭력의 상황에서 능동적으로 이야기하거나 동성애자나 사회적 약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개별적인 것보다는 대항 발화가 가능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 연대나 공론화가 훨씬 더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랭턴도 나중에 인정은 한다. 말대꾸가 화자를 침묵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퀴어라는 말을 퀴어네이션이라는 이름으로 말하면 화자가 이런 발화행위를 하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에 침묵 당한다는 것을 이정한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쉽지 않은 것 같고, 오히려 피해자들을 침묵시키는 것이 더 큰 것 같다고 나중에 더 재반박을 했다.
어쨌든 버틀러는 피해당사자의 말대꾸가 가능하고, 혐오 발언이 양면적인 측면이 있다고 논했다. 랭턴은 부정적 속성만 강조했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대단히 비관적인 것이다. '이미 열등한 지위에 있는데 혐오 발언 때문에 더 열등해지고, 우리는 전복이 안된다는 거냐 아예 언어적 불구가 되는 거냐', 하는 항의 때문에 혐오 발언의 양가성을 이야기하고 저항의 도구로 전복시키고자 한 것이다. 저하의 발언을 미러링 같은 방식으로 재사용하고 적의 무기로 쓸 수 있는 무기로 쓸 수 있기에 혐오 발언은 피해자를 침묵시키지만은 않고 피해자를 주체로 세울 수도 있게 된다.
한국사회를 봐도 여성혐오가 강했을 때 여성들이 발화 불가능했다. 그런데 메갈리아가 등장하면서 가능성도 보여주었다. 저항할 수 있는 저항주체가 탄생하고, 혐오 발언에 기생해서 말하는 방식도 보여주고 있지 않나, 혐오 발언에 대한 해법을 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위험성은 항상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소수자들이 미러링을 하거나 대응발화를 하면 그것이 다시 마찬가지로 말대꾸로 돌아올 수도 있다는 위험성이 늘 있다. 버틀러도 그런 얘기를 했다. 소수자 우대정책이 보수 우파가 재의미부여를 할 가능성도 있다. 그런 것은 어쩔 수 없을 것 같긴 하다. 그래도 어찌 되었건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큰 틀에서는 유효하지 않을까 하다. 또 되받아쳐 말하기의 한계가 제니터 혼스비 같은 페미니스트 분석 철학자도 권력관계의 비대칭 때문에 되받아쳐 말하기가 굉장히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이성애자와 남성들은 욕설의 총 어휘량을 많이 갖고 있고, 동성애자가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반대로 욕을 해도 한계가 있다 불가능하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 같다. 젠더 불평등도 있지만, 굉장히 다양한 권력관계가 교차하고 있다. 개개인이 반드시 권력의 강자라고 볼 수 없고 계급, 학벌, 인종, 중첩된 많은 것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샤니 마이트라 라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을 때 오히려 파생된 권력이 실린다고 주장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노인이든 기존에 권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에게 원래 없었던 권력이라고 하더라도 묵인된 방관하게 했을 때 방관된 권위가 실린다. 어디 캠핑장을 가려고 친구들끼리 계획을 짜는데 친구니까 다 평등한 관계인데 누가 나서서 너는 이것을 명령하는 상황을 가져온다. 아무도 거기에 개입하지 않는 사례를 제시한다. 그때에는 똑같은 친구이지만 그 발언을 명령 발언을 했을 때, 묵인하고 방관했기 때문에 묵인된 권력이 생기는 것이다. 특별한 권력을 가지 안 했지만, 내가 왜 네 말을 따라야 하는데? 하는 저항도 안 했기 때문에 권위가 실린 사례다. 거기에 대해서 혐오도 비슷하다. 그들이 반드시 강자고 약자이기 때문에 말대꾸하자는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은 어차피 힘이 별로 없고 버틀러식으로 본다면 어차피 묵인과 방관을 하면 권력을 갖게 되기 때문에, 저항 발언이 화자의 권위를 더 약화하는 지점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혐오 발언이 발생했을 때, 유태인에 대한 인종적인 혐오가 있었다, 그러면 그 다음에 방송이나 그런 곳을 통해서 나치 학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방송해준다거나, 지역 신문에 피해 당사자들의 발화를 실을 수 있는 것을 제도적으로 지원해주는 방안이 있다. 버틀러도 겔버도 공론장을 통해서 피해 당사자들의 연대를 통한 발화가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 같다. 혐오 발화자를 역으로 침묵시킬 수 있는 방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겔버는 말대꾸의 사례를, 방식을 좀 설명해준다. 혐오 발언을 이런 식으로 우리는 대응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너는 바보야 너는 멍청해 하고 말하면 세 가지 방안의 대처방안이 있다. 첫 번째는 사실성에 따라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대상 세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나는 어떤 성과를 냈고 어디서 일등을 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즉 팩트폭력을 하는 것이다. 팩트로 반박을 하는 거. 두 번째로는 정당성을 통한 말대꾸다. 규범을 이용한 것이다. 너는 나에게 이렇게 말할 권리가 없다고 반박하는 것이다. 진실성은 화자의 내면세계가 갖고 있는 진실성에 호소하는 것이다. ‘나는 네가 나에 대해서 그렇게 정말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호소다. 이런 식으로 말대꾸를 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의사소통행위이론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이다.
실제로 혐오 발언 현장에서 폭력적일 수도 있는 상황에서 개인이 나서서 말대꾸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게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도 있다. 그래서 랭턴을 비판하는 슈말처가 ‘말대꾸가 쉬운 줄 아냐 이는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맞는 비판 같다. 버틀러도 당장 개인이 말대꾸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공동체 연대를 통한 말대꾸를 이야기했을 것 같다. 그런데 실제로 성폭력의 상황에서 능동적으로 이야기하거나 동성애자나 사회적 약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개별적인 것보다는 대항 발화가 가능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 연대나 공론화가 훨씬 더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랭턴도 나중에 인정은 한다. 말대꾸가 화자를 침묵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퀴어라는 말을 퀴어네이션이라는 이름으로 말하면 화자가 이런 발화행위를 하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에 침묵 당한다는 것을 이정한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쉽지 않은 것 같고, 오히려 피해자들을 침묵시키는 것이 더 큰 것 같다고 나중에 더 재반박을 했다.
어쨌든 버틀러는 피해당사자의 말대꾸가 가능하고, 혐오 발언이 양면적인 측면이 있다고 논했다. 랭턴은 부정적 속성만 강조했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대단히 비관적인 것이다. '이미 열등한 지위에 있는데 혐오 발언 때문에 더 열등해지고, 우리는 전복이 안된다는 거냐 아예 언어적 불구가 되는 거냐', 하는 항의 때문에 혐오 발언의 양가성을 이야기하고 저항의 도구로 전복시키고자 한 것이다. 저하의 발언을 미러링 같은 방식으로 재사용하고 적의 무기로 쓸 수 있는 무기로 쓸 수 있기에 혐오 발언은 피해자를 침묵시키지만은 않고 피해자를 주체로 세울 수도 있게 된다.
한국사회를 봐도 여성혐오가 강했을 때 여성들이 발화 불가능했다. 그런데 메갈리아가 등장하면서 가능성도 보여주었다. 저항할 수 있는 저항주체가 탄생하고, 혐오 발언에 기생해서 말하는 방식도 보여주고 있지 않나, 혐오 발언에 대한 해법을 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위험성은 항상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소수자들이 미러링을 하거나 대응발화를 하면 그것이 다시 마찬가지로 말대꾸로 돌아올 수도 있다는 위험성이 늘 있다. 버틀러도 그런 얘기를 했다. 소수자 우대정책이 보수 우파가 재의미부여를 할 가능성도 있다. 그런 것은 어쩔 수 없을 것 같긴 하다. 그래도 어찌 되었건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큰 틀에서는 유효하지 않을까 하다. 또 되받아쳐 말하기의 한계가 제니터 혼스비 같은 페미니스트 분석 철학자도 권력관계의 비대칭 때문에 되받아쳐 말하기가 굉장히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이성애자와 남성들은 욕설의 총 어휘량을 많이 갖고 있고, 동성애자가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반대로 욕을 해도 한계가 있다 불가능하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 같다. 젠더 불평등도 있지만, 굉장히 다양한 권력관계가 교차하고 있다. 개개인이 반드시 권력의 강자라고 볼 수 없고 계급, 학벌, 인종, 중첩된 많은 것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샤니 마이트라 라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을 때 오히려 파생된 권력이 실린다고 주장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노인이든 기존에 권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에게 원래 없었던 권력이라고 하더라도 묵인된 방관하게 했을 때 방관된 권위가 실린다. 어디 캠핑장을 가려고 친구들끼리 계획을 짜는데 친구니까 다 평등한 관계인데 누가 나서서 너는 이것을 명령하는 상황을 가져온다. 아무도 거기에 개입하지 않는 사례를 제시한다. 그때에는 똑같은 친구이지만 그 발언을 명령 발언을 했을 때, 묵인하고 방관했기 때문에 묵인된 권력이 생기는 것이다. 특별한 권력을 가지 안 했지만, 내가 왜 네 말을 따라야 하는데? 하는 저항도 안 했기 때문에 권위가 실린 사례다. 거기에 대해서 혐오도 비슷하다. 그들이 반드시 강자고 약자이기 때문에 말대꾸하자는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은 어차피 힘이 별로 없고 버틀러식으로 본다면 어차피 묵인과 방관을 하면 권력을 갖게 되기 때문에, 저항 발언이 화자의 권위를 더 약화하는 지점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정토론 - 오찬호
한국에서는 토대가 더 천박하다. 그런 가운데서 버틀러가 미국을 진단한 것 같은 동일한 진단이 가능하겠냐는 반문이 가능하다.
버틀러 책 너무 읽기 어렵다. 옮긴이의 해제와 발표문, 시중에 떠도는 리뷰들을 보면서 이 책을 읽었던 것 같고 문장이 너무 어려웠다. (내가 비평을 하는 과정에서) 태생적인 오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옮긴이의 해제와 리뷰들을 내가 근거 삼아서 이야기를 하는 거기 때문에 버틀러에 관한 정확한 적용이 아닐 수도 있다 – 아니라고 생각되면 그것을 가지고 논쟁을 하는 것이지만, 오찬호 토론자가 알게된 차원에서 토론을 하고자 한다.
(발표의 내용에) 나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혐오 발언 규제가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는 사람들을 처리한다고 되었다면 애초에 그런 문제는 빨리 해결되었을 것이다. 말하는 사람이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과정이 있고, 어떤 단어가 누군가에게 폭력이 되고 압박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를 수 있는 사람도 있다. 이 단어가 저 사람에게 어떤 위축을 가하는지에 대해서는 사회적 학습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다. 그게 시대의 결과물이다. 한 개인이 그런 생각을 갖게 된 배경에 관한 것이 원인이기 때문에 그 원인을 제대로 짚어 내지 않는 혐오 발언에 대한 공적인 규제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여자는 회식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들은 불과 얼마 전에 검찰 총장이 했던 말이기도 하다. 지식과도 상관없고, 공부하고 똑똑하면 이런 단어를 걸러내고 하는 것은 수학 문제 풀 때 적용되는 것이지 문화에 관해서 ‘옳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리 틀린다고 말하더라도 ‘옳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 말을 한 사람에게 ‘그런 말 하면 안 돼’라고 단죄를 하는 국가권력의 개입이나 구체적인 페널티를 준다고 해서 과연 그 말을 하게 된 성차별의 기울어진 운동장이 과연 달라지는가? 하는 것이다. 그 말이 바로 기울어진 운동장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남자가 항상 우대를 받고 위로 올라가고 여성이 부차적으로 이야기되고 주된 행위를 남성이 하고 일상에서도 그것을 터무니없이 적용했을 뿐인 결과물이다. 그 결과를 다루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러니 ‘회식도 업무의 연장이다’라는 전혀 혐오스럽지 않은 말부터 사라져야 한다. 회식도 사회의 업무라고 생각한다는 가치판단이다. 그런데 그 가치판단이 널리 받아들여지면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퍼져나간다. 왜 회식을 업무로 봐야 하는가, 이상한 조직문화고 우리의 조직문화가 공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야매의 문화 속에서 회식도 중요한 정보가 교류되는 장소가 돼버린 것이다. 공적인 정보를 공공의 업무시간에 못하니까. 그것은 필연적으로 여성들에게 불공평한 상황이 된다. 토대가 무너지면 잔가지는 파생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문장이 혐오가 아니다는 것을 가려 규제하자 말자 하는 것은 그것은 심리적인 위안이 될 뿐이다. 그러나 그 사람의 생애의 과정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내가 당하게 되는 근속연수의 문제 승진의 문제 임금 등 실제적인 문제가 줄어들 가능성은 적다.
‘여성은 회식에 안 와~’ 하는 말에 지적하는 말을 한다면 에이고 역풍 맞는다고 하고 그냥 말을 안 하게 된다. 물어야 하는 것은 ‘왜 그렇게 말하였는지 ’이다. 한국사회에서 가사 분담시간에 대한 불균등에 대한 문제가 있는데 왜 그런 비논리적인 말을 던지는가? 하는 말이다.
갑질하던 사람을 뭐라고 하면, 그 사람이 비워져 나간 또 다른 누군가가 갑질을 하지 않겠나? 소용이 없다. 소설가가 왜 그렇게 권력을 갖고 있느냐에 대해서 반문하면 여자 소설가는 갑질을 못 한다. 신춘문예 심사위원으로 없다. 그런 상황에서 갑과 을의 위치가 생기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 이런 것을 강력히 처벌하는 것이 연대를 도와주지 않는가? 이렇게 하지 말라는 사회적인 선언을 하는 것 아닌가?
(어떤 여성혐오 문제를 지적할 경우) '모든 남자가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기상천외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소용이 없다. 학교 폭력에 대한 잔인성을 고발하는데, 모든 교사가 그렇진 않아 하는 말은 안 하잖아. 어떤 구조에서 늘 폭력적인 교사나 남자가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은 다 알기 때문에 굳이 하지 않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얘기가 굳이 또 나온다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귀가 안 열린다는 것이다. 남자들은. 어쩌다 한 명 성격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남자가 있는 곳에서는 늘 만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구조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시사인이) 메갈리아를 비판하지 않았다고 구독중지 운동하는 남성들은 한국에서 되받아쳐 말하기나 그것으로 말하기라는 버틀러식 적용이 안되니까 발언 내 행위라고 규정하고 언어의 폭력성이 있다고 이야기를 하게 되는 한국의 풍토를 보라. 한국에서는 발언 효과 행위가 불가능한 풍토를 지적해야 하는 것 아닌가?
역시 미국은 표현의 자유를 굉장히 광범위하게 강조한다. 자기들 시장의 공정성을 믿는다. 차별하고 혐오 발언을 하면 상품성이 떨어진다. 애인이면 애인가치가 떨어지고 교사면 교사 가치가 떨어진다. 그래서 그 자연스럽게 사라진다는 혐오 발언을 하지 않게 되는 교육이 가능하게 된다.
boo 하지 말고 투표하면 됩니다. 라는 오바마의 말. 우리 민주주의가 그 사람에게 권력을 주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으므로 가능한 일이다. 버틀러는 이런 풍토에서 무관하지 않다. 역으로 한국에서 그런 훈훈한 시장의 작동을 믿기에는 한국은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얼마나 당당하면 논의할 문제가 아닌 것까지도 논의가 됩니까. 한국사회가 혐오규제 해야 한다는 목록을 합리적으로 정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굉장히 회의적이다. 이 책에서는 이 발제문에서는 쓰진 않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어떤 단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말하는 것이 내가 살아가는 가운데서 정상과 비정상을 자연스럽게 구분하느냐 하는 차이가 중요하다. 수업 시간에 동성애자에 관해 반대한다는 사람들이 질문을 할 때 나는 '우리랑 같은 사람들이다, 동성애자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것이 바로 이해는 하지만 ‘옳지만 동의할 수 없다'는 말을 촉발한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자는 회식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들은 불과 얼마 전에 검찰 총장이 했던 말이기도 하다. 지식과도 상관없고, 공부하고 똑똑하면 이런 단어를 걸러내고 하는 것은 수학 문제 풀 때 적용되는 것이지 문화에 관해서 ‘옳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리 틀린다고 말하더라도 ‘옳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 말을 한 사람에게 ‘그런 말 하면 안 돼’라고 단죄를 하는 국가권력의 개입이나 구체적인 페널티를 준다고 해서 과연 그 말을 하게 된 성차별의 기울어진 운동장이 과연 달라지는가? 하는 것이다. 그 말이 바로 기울어진 운동장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남자가 항상 우대를 받고 위로 올라가고 여성이 부차적으로 이야기되고 주된 행위를 남성이 하고 일상에서도 그것을 터무니없이 적용했을 뿐인 결과물이다. 그 결과를 다루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러니 ‘회식도 업무의 연장이다’라는 전혀 혐오스럽지 않은 말부터 사라져야 한다. 회식도 사회의 업무라고 생각한다는 가치판단이다. 그런데 그 가치판단이 널리 받아들여지면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퍼져나간다. 왜 회식을 업무로 봐야 하는가, 이상한 조직문화고 우리의 조직문화가 공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야매의 문화 속에서 회식도 중요한 정보가 교류되는 장소가 돼버린 것이다. 공적인 정보를 공공의 업무시간에 못하니까. 그것은 필연적으로 여성들에게 불공평한 상황이 된다. 토대가 무너지면 잔가지는 파생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문장이 혐오가 아니다는 것을 가려 규제하자 말자 하는 것은 그것은 심리적인 위안이 될 뿐이다. 그러나 그 사람의 생애의 과정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내가 당하게 되는 근속연수의 문제 승진의 문제 임금 등 실제적인 문제가 줄어들 가능성은 적다.
‘여성은 회식에 안 와~’ 하는 말에 지적하는 말을 한다면 에이고 역풍 맞는다고 하고 그냥 말을 안 하게 된다. 물어야 하는 것은 ‘왜 그렇게 말하였는지 ’이다. 한국사회에서 가사 분담시간에 대한 불균등에 대한 문제가 있는데 왜 그런 비논리적인 말을 던지는가? 하는 말이다.
갑질하던 사람을 뭐라고 하면, 그 사람이 비워져 나간 또 다른 누군가가 갑질을 하지 않겠나? 소용이 없다. 소설가가 왜 그렇게 권력을 갖고 있느냐에 대해서 반문하면 여자 소설가는 갑질을 못 한다. 신춘문예 심사위원으로 없다. 그런 상황에서 갑과 을의 위치가 생기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 이런 것을 강력히 처벌하는 것이 연대를 도와주지 않는가? 이렇게 하지 말라는 사회적인 선언을 하는 것 아닌가?
(어떤 여성혐오 문제를 지적할 경우) '모든 남자가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기상천외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소용이 없다. 학교 폭력에 대한 잔인성을 고발하는데, 모든 교사가 그렇진 않아 하는 말은 안 하잖아. 어떤 구조에서 늘 폭력적인 교사나 남자가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은 다 알기 때문에 굳이 하지 않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얘기가 굳이 또 나온다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귀가 안 열린다는 것이다. 남자들은. 어쩌다 한 명 성격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남자가 있는 곳에서는 늘 만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구조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시사인이) 메갈리아를 비판하지 않았다고 구독중지 운동하는 남성들은 한국에서 되받아쳐 말하기나 그것으로 말하기라는 버틀러식 적용이 안되니까 발언 내 행위라고 규정하고 언어의 폭력성이 있다고 이야기를 하게 되는 한국의 풍토를 보라. 한국에서는 발언 효과 행위가 불가능한 풍토를 지적해야 하는 것 아닌가?
역시 미국은 표현의 자유를 굉장히 광범위하게 강조한다. 자기들 시장의 공정성을 믿는다. 차별하고 혐오 발언을 하면 상품성이 떨어진다. 애인이면 애인가치가 떨어지고 교사면 교사 가치가 떨어진다. 그래서 그 자연스럽게 사라진다는 혐오 발언을 하지 않게 되는 교육이 가능하게 된다.
boo 하지 말고 투표하면 됩니다. 라는 오바마의 말. 우리 민주주의가 그 사람에게 권력을 주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으므로 가능한 일이다. 버틀러는 이런 풍토에서 무관하지 않다. 역으로 한국에서 그런 훈훈한 시장의 작동을 믿기에는 한국은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얼마나 당당하면 논의할 문제가 아닌 것까지도 논의가 됩니까. 한국사회가 혐오규제 해야 한다는 목록을 합리적으로 정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굉장히 회의적이다. 이 책에서는 이 발제문에서는 쓰진 않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어떤 단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말하는 것이 내가 살아가는 가운데서 정상과 비정상을 자연스럽게 구분하느냐 하는 차이가 중요하다. 수업 시간에 동성애자에 관해 반대한다는 사람들이 질문을 할 때 나는 '우리랑 같은 사람들이다, 동성애자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것이 바로 이해는 하지만 ‘옳지만 동의할 수 없다'는 말을 촉발한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게 되는 것이다.
자유토론 중 발췌한 내용
오찬호 :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다 강력한 규제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항상 그런 말을 한다. 법이 규제가, 그 문화를 얼마나 바꾸나? 당당하게 최저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점주들도 많다. 우리나라는 법이 굉장히 강력하게 무언가를 지배할 것 같긴 하지만, 어떤 규제가 본질적인 문제를 즉각적으로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물론 단기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규제를 통해 받을 수 있는 심리적 위안은 크다. (어떤 회사에 규제를 통해 혐오발언을 막는 경우) 저 회사에 사람들은 함부로 말하지 못한다는 효과는 있겠지만, 그걸로 전체 회사가 하나의 규제가 설치되고 적용되고 하기에는 여전히 기업의 수준이나 기업 구성원들의 수준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말 자체가 원천적으로 규제, 응징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약간 본질적인 문제 해결보다는 효과가 떨어지지 않는가 하고 보는 것이다.
유민석 : 예를 들어 학내 혐오 발언 정의하려는 곳이 있었는데, 규제하기 위해서 넣다 보니까 이거저거 다 넣게 되었다. 나중에 규제할 수 없어졌다 결국에 철회한 경우가 있었다. 정의하는 것 자체가 힘들고 그것을 규제하다 보니까 그것이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처럼 언어를 규제하는 방식이 되면 문제다. 혐오 발언 자체가 정의하기 힘들다. 명백하게 혐오 발언이라고 간주하는 껌둥이, 김치녀 같은 것들은 명백하긴 하지만 모호한 경우가 더 많다. 그것이 더 세련된 방식의 혐오일 수도 있다. 오히려 굉장히 논리정연한 혐오였다. 굉장히 통계 자료를 제시하고 세련된 경우 어떤 특별한 어휘를 규제할 경우 더 문제가 되는 경우를 빠져나가게 된다. 오히려 혐오 발언을 규제하려고 했을 때에는 정말 명백한 것만 규제가 되고, 정말 세련되고 엘리트적이고 학계, 언론계에서 교묘한 사람들의 혐오 발언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면죄부를 부여하게 된다.
오찬호 : 만약에 직장에서 그런 혐오가 있다면 권력자가 되받아치기하게 될 때, 자신들의 입장에서 되받아치기해서 굉장히 많은 규제를 하게 될 수도 있다. 회사가 혐오 발언을 규제하기 시작하면 회사를 혐오하는 발언을 하지 못하게 한다든가 오히려 그것을 규정하게 되는 힘이 있다.
유민석 : 주로 유럽에서는 혐오 발언이 좀 규제하는 분위기가 있다. 헨리 루이스 게이트 주니어라는 학자는 학교폭력 왕따가 이르러 가는 데, 선생님이 네 편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는가 하는 것이다. 혐오 발언 규제는 적을 죽이게 되는데 나까지도 죽는 독가스 살포와도 같다. 그래서 규제를 반대하는 입장 쪽으로 정리가 되었다. 오찬호 선생님도 그 토론을 이야기했었는데 사실 어떤 혐오의 원인은 이 언어에 있다기보다는 이 언어가 상처를 주기 때문에 없애려는 경향이 강한데, 언어에 집중하는 것은 꿩이 머리를 수풀에 박고 언어가 없으니까 자기는 차별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혐오 발언들을 침묵시키는 것은 그들을 결코 논파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면에 더 차별적인 구조가 있으므로 말만 없애는 정책이 크게 의미가 있는 것 같지 않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것이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유민석 : 이론적으로 대항할 수 있다는 것보다는 한국사회에서 혐오 발언에 대한 대항이 일어나고 있다. 문단계에서의 성폭력 공론화나 각계각층에서 이야기들이 터져 나오고 있다. 이제 이것이 일종의 혐오 발언의 대항하기의 방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규제하자는 입장도 혐오 발언에 대한 되받아쳐 말하기의 일종이다. 여성들이 기존에 혐오 발언으로 침묵 당했던 경우가 많으면, 지금은 이제 발화 방식 자체가 바뀌었다. 어떤 혐오 발언이 여성들에게 낳았던 효과가 있는 것이다. 왜 스타벅스를 안 가고 왜 개념녀 코스프레를 하게 되었을까? 혐오 발언이 인식과 욕망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메갈리아 등도 역코르셋을 채우거나 코르셋을 벗게 만드는 힘을 준다. 그래서 많은 여성이 이런 말들이 굉장히 찌질한 거였구나, 없는 존재를 망상적으로, 여성부가 어쨌다더라, 등쳐먹었다더라 하는, 고등학생조차 꽃뱀을 말하는 망상이 있는데 그동안 혐오 발언이 여성들에게 가져왔던 효과가 있는데, 성폭력 공론화나 메갈리아나 해시태그 운동들이 또 다른 혐오 발언이 가졌던 효과만큼 대항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전적으로 효과가 있거나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가능성은 굉장히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혐오는 대항이 늘 가능하다는 낙관적인 결론을 내리고 싶다.
오찬호 : 명예훼손죄가 있으니까 사람을 적시한 혐오는 처벌을 받을 수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러나 딜레마는 있다. 나도 딸을 키우는데 당사자는 워낙 구조적으로 우리나라는 여성들이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 문단계에서도 하는 말이 피해자가 만족하기 위한 처벌은 사회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법은 그런 식으로 집행이 되면 안 되는 것이다. 사회적 원인도 파악하고, 어쨌든 사회적으로 그 사람이 돌아올 수 있는 것까지 생각해야 한다. 당사자 입장과 한발 떨어진 사회적 가치에서 생각해볼 때 그 괴리감이 참 크다는 생각을 한다. 머리로는 그렇게 이해는 하지만 내 딸에게 그런 일이 있을 때, 이런 낭만적인 이야길 할 수 있을까, 싶다. 딸이 혐오의 스피치를 당할 수 있는 확률을 줄여나가는 것이, 혐오를 당했을 때 상대를 내가 자리 못 잡게 해주는 발상보다는 자연스럽게 확률적으로 과거보다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혐오를 받는 경우의 수를 줄여주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만큼 이 문제는 딜레마적이다. 그래서 버틀러의 이 논의가 한국 사회의 토대에서 미국과 같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반문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