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주권적 수행 문
국가 발언 / 혐오 발언
발제 및 발표자 : 강영준
혐오 발언은 그 자체로서 행위하는 말이지만 동시에 담론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혐오 발언의 수행성이 설명될 때에는 그것의 수행성은 이중으로 성립된다. 즉 그것 자체가 갖는 어떤 수행성과 그런 것을 정의하는 것으로서 수행적 권력을 갖는 이론에 의해서 생산되는 일을 통해서이다.
버틀러에 의하면 “혐오 발언이 차별 행위로 간주된다면, 혐오 발언은 법원이 결정해야 하는 문제”(183)가 된다. 즉 차별 행위로서 혐오 발언을 규정하고 규제하는 법원의 수행성에 의해 오히려 그러한 차별 행위로서의 혐오 발언은 다시 한 번 생산되고 수행적인 것으로 정립된다. 즉 법원의 권력이 혐오 발언을 바로 차별 행위로 규정할 때에 그것은 실질적으로 그런 것으로서 사회에 다시 생산된다. 국가 발언(특히 법원의 판결문)이 그런 수행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국가 발언은 혐오 발언을 생산해낸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은 “국가의 발언이 … 인종차별적이거나 성차별적인 욕설과 같다는”(185)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발언에 의해서 혐오 발언이 결정된다는 것, 그런 한에서 그들은 항상 같은 장소를 공유한다는 것, 이런 점에서 혐오 발언과 국가 발언은 분리되지 않는 것들이다.
법에 의해 혐오 발언이 규정될 경우 그것들은 다시 자신들의 원천이었던 인종차별, 성차별적인 담론을 비판하는데 사용되며 오히려 그 과정 속에서 그런 담론은 계속해서 재생산된다.
또한 법에 의해 보호될 수 있는 표현과 그렇지 않은 표현의 구분이 강화되면서 법원은 이제 표현을 규제하는 역할을 떠맡는 곳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제 법원은 표현의 생산자가 된다. 국가는 “동성애 표현을 억제할 뿐 아니라, 자기 검열적인 동성애에 대한 공적인 관념을”(186) 생산한다.
마츠다는 법을 도구적인 것으로 보는데 버틀러에 의하면 이것은 법적 절차에서 진행되는 “생산적인 오용”(187)을 간과한 것이다. 어쨌든 마츠다에 의하면 법적인 언어는 재구성되어서 인용될 수 있는 언어이다. 그러므로 어떤 반동적 역사를 가진 법이라도 전도되어서 진보에 기여하는 것으로 다시 인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버틀러는 두 가지를 지적한다. (아마도 이 부분에서 버틀러는 마츠다가 이렇게 생각한다고 보고 이것을 비판하려는 것 같다) “첫째, 법이 수행한다고 할 수 있는 인용적인 전도의 종류는 포르노그래피에 부여된 인용적인 전도와는 정확히 반대라는 것이다.”(187) “두 번째 지점은 이렇다. 비록 법은 그 형성이 아무리 반동적이라 하더라도 재의미부여적인 실천으로 이해되며, 혐오 발언은 그 형성이 반동적이긴 하지만 동일한 방식으로 유의미한 재의미부여에 취약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것이다.”(188)
그렇게 되었을 때에 법적 발언의 재의미부여 가능성과 실천이 긍정되는데도 혐오 발언의 재순환만은 인정되지 않게 된다. 그러나 혐오 발언을 미학적으로 재연함으로서 그 말은 그 자체로서 고정적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 “유산과 효과가 의미론적으로 혼합”(189)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할 뿐이라는 점을 환기시킬 수 있게 된다. 이때 혐오발언은 “그것들의 언어적인 관습성 속에서 강압적인 동시에 자의적인, 반란적인 동시에 재사용에 열려 있는 것으로 제시된다.”(190)
혐오 발언은 여러 담론 속에서 인용되고 재생산됨에 따라 “스스로 공적 텍스트로서 재생산”(190)한다. 피해자를 향해 날아가는 화살과 그저 전시대 위에 놓여있는 화살은 다르다. 그리고 혐오 발언 또한 그 자체로서 항상 고정된 결과를 생산해내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