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저자가 밝히는 이 책의 목적 : 이 책은 미국 흑인 여성을 이해하고자 쓴 이 책은 미국 맥락에서 뿐만 아니라 다인종, 다문화 사회에서 인종, 계급, 종족, 젠더, 섹슈얼리티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다. 8p. 또, 비판사회이론인 흑인 페미니즘 사상의 발전이 지닌 의의를 기술하고 분석하고 설명하는 것. 또, 인종, 계급, 젠더 연구로 알려진 해석틀(패러다임)을 사용하면서 이 틀을 심화시키는 것이다. 또, 흑인 페미니즘의 사상을 평가하고 그것의 발전을 막은 기저의 가정을 밝히는데 사용할 인식론적 틀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글쓴이는 흑인여성 공동체의 참여자이자 관찰자로 자신을 정의한다. pp. 49-52.
흑인여성의 풍성한 지적전통에도 불구하고(사상가들은 25p. 문단 3 참조), 이는 왜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있었을까? 이러한 비 가시화는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 지배집단은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과 대항지식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종속집단이 스스로의 피해와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에 부역하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Scott, 1985), 24p.
미국 뿐 아니라 흑인 여성이 살고 있는 다른 지역들, 아프리카, 카리브해지역, 라틴아메리카, 유럽 등에서 흑인여성과 그 사상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드는 것이야말로 사회 불평등을 유지하는데 핵심이다. pp. 24-25.
미국 흑인 여성에 대한 억압은 교차하는 세가지 차원으로 이루어져있다. 첫째, 무쇠 솥과 주전자로 대표되는 흑인여성에 대한 노동 착취와 빈곤 (경제적 차원), 둘째, 양질의 교육에서 제외되고 투표나 공공업무에서 배제되고, 형사법체계에서 평등하고 공정한 처리를 하지 않는 정치적 종속 (정치적 차원), 마지막으로 이데올로기적 차원이 있는데, 이는 흑인 유모나 제제벨jezebel, 번식 동물 등 부정적으로 정형화된 이미지로 흑인여성을 억압한다. pp.27-28. (4장 참조)
*제제벨 : Jezebel : 제제벨은 19세기 중반 빅토리아 시대 여성의 모든 면에서 정확히 반대의 이미지를 가진다. 흑인 여성이 성적으로 방탕하다는 이러한 아이디어는 흑인 여성을 처음 본 유럽인으로부터 유래한 것인데, 더운 날씨에 익숙하지 않았던 그들이 세미누드로 지내는 그들을 성적으로 해석한데서 기원한다(멍청이들). 또한 중혼을 하던 문화가 성욕이 잘 통제되지 않는 특성이 있다, 전통 춤이 야하다 등등 별 시덥 잖은 이유들로 이러한 개념이 처음 출발한 것이다. 흑인 여성 노예가 성적으로 왕성하다는 이미지는 많은 아이들을 출산한다는 이미지와 연결되는데, 그래서 흑인 여성이 성적으로 방탕하고 부도덕하다는 라벨이 붙여지게 된다. 이 이미지는 또한 흑인 여성이 강간의 피해자가 될 수 없다는 식의 억견을 생산하는데 백인 남성에 의해 흑인 여성 노예가 강간당하는 상황에서 정당화 근거로 쉽게 쓰이곤 했다. (...) 또한, 백인 노예주는 자신의 강간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이미지를 자주 차용하였으며, 노예제 폐지 이후에도 아프리칸 아메리칸 여성들은 여전히 그러한 이미지로 인해서 성폭력에 시달리곤 한다. (출처 : 위키피디아 “Stereotypes of African Americans” https://en.wikipedia.org/wiki/Stereotypes_of_African_Americans 접속일 : 2017년 2월 2일)
백인 페미니스트 학자는 대체로 흑인 여성을 동료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낸치 소도로우, 캐롤 길리건의 저작은 페미니즘 이론발전에 큰 기여를 했으나, 백인 중산층 여성만이 ‘여성’이라는 가정을 더욱 강화했다. 혹은 자신의 실천은 거의 바꾸지 않으면서 다양성의 필요성은 긍정하는 척 사탕발린 말만 하는 방식으로도 흑인 페미니즘 사상은 외면되기도 했다. 이들은 자신이 흑인은 아니기 때문에 “흑인여성의 경험”을 이해하거나 말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한다. 다른 이들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안전하게 “선별된” 흑인 여성의 목소리를 포함한다. 이 두 부류는 미국 백인 페미니스트의 작업에 지침이 되는 패러다임을 기본적으로 바꾸고 싶어 하지 않는 정치적 무의식을 보여준다. 다인종의 다양한 페미니즘을 발전시키려는 진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진척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인종’을 가로질러 연대한 美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30p. 마지막 문단 참조) pp. 29-31.
흑인 운동 내에서도 흑인 여성들에 대한 성차별주의는 만연하다. 그러나 흑인 조직 내부에서 끈질기게 투쟁하며 흑인 페미니즘의 사상을 표현한 사람들이 있다. 미국의 흑인 여성 지식인들은 흑인사회, 정치사상의 남성주의적 편향, 페미니즘 이론의 인종차별주의적 편향, 그리고 이 둘 다에 있는 이성애중심주의적 편향을 교정해야한다고 주장해왔다. 흑인 여성의 사상이 점점 더 가시화되긴 했지만, 흑인 시민사회 내부의 반대에 부딪히곤 했다. 1970년대 들어 흑인 여성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일부 흑인 남성들은 그러한 저작들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pp.32-33.
흑인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은 흑인 교회나 시민사회 등 흑인단체에서 흑인여성이 더욱 복종적인 후원자 역할을 하도록 격하시키는 것이야말로 흑인의 정치적 힘 기르기에 방해물로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여러 흑인 민족주의론은 정치투쟁에서 흑인여성의 역할에 대한 견해로 인해 공격을 받아왔다. 161p.
흑인 여성의 비판사회이론을 추동해온 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는 (분리된) 흑인주거지역이다. 이는 흑인에게 분리된 공간을 제공하고, 인종억압에 저항하고자 흑인 특유의 대항 지식을 벼리어 내었다. 나름의 세계관을 빚어 경험에 질서를 부여하고 평가했고, 그 세계관은 끊임없이 진화했다. 또 다른 요소는 흑인 여성이 일터에서 공통적으로 겪은 경험이다. 흑인여성은 가사노동에 주로 종사하도록 게토화 되었고, 중요한 모순을 드러내는 도화선이 바로 여기에 있다. 가사노동은 흑인여성에 대한 경제적 착취를 강화하는 동시에 뚜렷이 흑인여성중심적인 저항의 형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창출했다. 백인 엘리트의 삶을 지켜볼 수 있는 지회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인종차별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자신들을 신비화함으로써 자신들의 노동을 착취한다는 점을 꿰뚫어 보는 탈신비화과정을 겪고, 자기 스스로를 긍정하는 경험으로 이어졌다. 내부자이면서도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노동자이자 외부자라는 outsider-within이라는 사회적 위치를 통해 흑인여성 고유의 관점을 갖게 된 것이다. pp. 37-38.
백인 여성과 그들의 가정에서 작동하는 가부장적 권력과 권위의 모순을 직시하는 내부자의 시선을 습득한 흑인 여성은 다음과 같은 이데올로기의 모순에 대해 묻게 된다 : 근거 없이 단언된 말처럼 ‘여성이 수동적이고 약한 존재’라면 흑인여성은 어찌해서 “노새 취급”을 받으며 고단한 가사 노동을 할당받는가? 좋은 어머니란 가정에 머물며 자녀를 돌보는 존재라면 생활보조금을 받고 사는 흑인여성은 왜 자기 아이를 탁아소에 맡기고 일을 해야 하는가? 여성의 고결한 임무가 어머니가 되는 것이라면 왜 10대 흑인 어머니는 피임수단을 사용하도록 강요받는가? 인종, 젠더, 계급이 복잡하게 서로 맞물려 작동하는 여러 억압이 어떻게 이러한 모순들을 강화하는지를 탐구하는데 유효한 흑인 페미니즘이 부재할 경우, 폄하된 노동과 실패한 어머니의 존재로 인해 제기된 비판적 관점은 쉽게 내적인 문제로 방향을 틀고 그 결과 억압을 내면화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흑인여성의 대항지식이 집단적으로 공유되며 흑인 페미니즘 사상으로 발전되는 기반이 되었다. 사회 부정의를 분석하고 이에 대항할 상상력이 넘치는 대응방식을 창조하는 것은 흑인 페미니즘 사상의 핵심적 특징이다. 39p.
서저너 트루스의 사례가 인상깊다 : 트루스는 흑인여성인 자신의 삶과 여성에게 부여되는 특성 사이에 모순이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여성이라는 개념이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드러낸다. (1800년대 중반에.) 이등시민으로서 트루스는 남성에게 도움을 받지 못하고 고된 육체노동을 했다. 그러나 당대에는 여성은 도움을 받아야 하고, 육체노동을 하지 말아야 하는 존재라는 인식이 만연했고, 트루스는 “그렇다면 자신은 여성이 아닌가?” 라는 말로 여성이라는 단어가 모든 여성을 지칭하는 포괄적 용법에 모순이 내재한다는 점을 드러냈다. 트루스는 여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기존의 가정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그 기준에 적합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그 기준 자체에 도전했다. 그녀의 행동은 해체deconstruction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개념이 현실을 단순하게, 혹은 자연스럽게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것, 즉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드러내는 과정이 바로 해체다. 트루스는 여성이라는 개념을 해체했다. 그는 읽고 쓰는 법을 결코 배운적 없는 노예였다. pp.44-45.
사람은 지식인으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고등교육을 받은 모든 이들이 자동적으로 지식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흑인 페미니즘에서 관찰되는 종류의 지적 작업은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지는 실제 사회적 위치와 상관없이 (즉, 노예인지 아닌지, 교육 수준이 어떠한지에 상관없이-김성희) 모든 흑인여성을 위해 말하는 자의식적 투쟁과정을 요구한다. 또 이들을 배출한 집단에는 음악가, 가수, 시인, 작가, 예술가 집단이 있다. 45p, pp.46-48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