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19일 화요일

[강의] 페미니즘 언어철학 기초 2강


2. 여성은 어떻게 표시되고 지워지는가?



사진 출처 : 말과 활 아카데미


기록자 : 김민기 (참고 : 기울어짐은 개인적 낙서)

페미니스트들은 우리가 담론에 의해 표시되는 동시에 지워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대상으로서는 표시되는 반면에, 주체로서는 지워지기 때문이다.(티렐 2000)
언어 안에서 여성들은 두 가지 방식의 담론 실천에 의해 억압받고 있다. 첫째, 여성은 표시된다. 표시하는 것은 여성들의 (아마 생물학적?)여성성에 주목하고 열등성의 함의를 전달한다. 여성은 나타나지만, 오로지 열등한 것으로서만 나타난다. 표시는 대명사, 접두어, 그리고 섹스-특정적인 단어들에 의해 달성된다. 하찮고 부차적이고 비전문적인 것으로 표시하는 언어적 실천들은 우리를 약화시키도록 복무한다.
둘째, 여성은 주체로서는 지워진다. 언어실천은 여성을 외부인으로, 텍스트의 대상으로 설정할 뿐이며, 시종일관 말하는 주체로는 설정하지 않는다. 이 두 방식 사이에는 모순적인 긴장이 있다.
표시와 지움..

1. 표시되는 여성 ; 여성은 대상으로서는 표시된다.
Ex) 여의사, 여사장 ...
Cf) 용의녀, 박유천녀; 용의자든 피해자든 상관없이 사건에는 여성이 표시된다. 사건보다 중요한 것이 성별? (용의녀는 정말 츙격..)
프라이는 영어와 기타 다른 많은 언어들에서 요구되는 섹스 표시가, 그것이 필요하지 않은 곳에서도 섹스 관련성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누군가는 그들의 섹스를 알지 못하고서는 특정 개인을 지칭하기 위해 대명사를 사용할 수 없다. 이는 섹스가 필요하지 않음에도 섹스를 관련시키는 사례로 간주되며, 이는 성차별주의의의 핵심 특징으로 간주할 수 있다. 지시하기 위해 섹스를 끊임없이 요청하는 것은 섹스가 모든 영역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는 신념을 영속시킨다. 남성 지배는 남성과 여성이 서로 중대하게 다르다는 믿음을 필요로 하며, 따라서 성차가 중요하다는 영감에 기여하는 모든 것은 남성 지배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질문타래)
1. 현재 정말로 그런 모든 경우가 남성 지배에 기여하는가?
2. 미래에도 그럴 것인가? (즉 벗어날 수 없는가, 언어의 한계일까)
3. Sex-marking이 있어도 상관없는 것이 좋은가, 혹은 없는 것이 나은가?
(답변)
1. 페미니즘 언어철학자마다 질문과 관련해서 갖는 입장이 다르다.
2. 입장이 다르다.
3. 입장이 다르다.
이와 관련해서, 적어도 어떤 쟁점에서 입장이 다른지 후술하겠음. 자세한건 3강과 4강에서 얘기될 것임.
때로 권위있는(있는 것처럼 보이는) 젠더 특징적인 용어들이 있다. 이 용어들은 확실히 여성들의 비가시성에 기여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것들은 여성의 존재를 환기시킨다. 그것들은 권위를 가진 자리(의사와 사장 등)에서의 여성의 존재를 오히려 강조한다. 그러나 이 역시 굉장한 예외화와 권위화를 통해 일탈시키는 형태라는 것으로 볼 때 여성혐오에 분명하게 기여한다고 말할 수 있다.

- 지칭적 젠더화
한줄요약 :  성별을 얘기해야 지칭할 수 있다. (he, she..)
; 엘리자베스 레인 비어즐리의 지칭적 젠더화Referential genderization(1976)"
화자가 인간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어떤 젠더를 특정할 것을 요청하는 관습들은 젠더화된 자아 이미지, 심리학적인 젠더 정체성, 섹스들 간의 신분 차이 등과 같은 기타 여러 가지 젠더화를 만들어내는 주춧돌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구분을 행할 때마다 차등적인 평가를 하기 쉬운 우리의 경향을 충족시킨다(차등적인 평가를 하기 쉬운 우리의 경향...). 문법에 맞도록 하기 위해 구분을 행할 것을 요청받는 것은, 광범위한 성차별을 조장하는 개념적 틀을 만들어낸다.

- 보부아르 <2의 성>
여성은 섹스이며 성적인 존재다.
여자는 남자에 대해서 달라지지만 남자는 여자에 대해 달라지지 않는다. 남자는 주체이며, 절대이며, 기준이 됐다. 그러나 여자는 그렇지 않다.
남성은 여성 속에 교활함, 인내심 없음, 비굴함, 음탕함 등의 부정적 속성을 던져 넣는다.
남성은 개인/인간이 되지만, 여성은 여성 집단종의 일원만 될 수 있다.

2. 지워지는 여성 ; 여성은 주체로서는 지워진다.
대상으로는 표시되구 주체로는 지워지구.. 뭐 어쩌라는겨 어떻게 말하라는겨 -> 3강에서!

- 거짓된 젠더 중립성,  인간은 젠더 중립적인 용어가 아니다.
(1) he는 와인을 마셨다.
(2) 어떤 남자man가 바에 들어갔다.
(3) 학생이 교실로 들어올 경우, he는 유인물을 집어가야 한다.
(4) 사람man은 영장류이다.

he' 인간man'과 같은 젠더 중립적인 용어 사용에 관해 상당한 페미니즘적인 관심이 있어왔다. 이 용어들은 문장 (1) (2)에서처럼 젠더 특정적gender-specific인 의미들을 가지고 있으며, 문장 (3) (4)에서처럼 젠더 중립적gender-neutral인 의미들을 가지고 있다고 흔히 일컬어진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은 심지어 젠더 중립적이라고 여겨지는 이 용어들의 의미조차도 전혀 젠더 중립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재니스 몰튼(1981a)과 아델 메르시에(1995)는 젠더 중립적인 의미로 의도된 것이 분명하면서도, 그 의미들이 이용될 수 없는 사례들을 제공한다. 그 결과 그 문장들은 비문법적인 것처럼 보인다.
(5) 인간에겐 두 개의 성이 존재한다. 어떤 인간men은 여성이다.
(6) 인간은 그의his 아이에게 모유를 먹인다.
(7) 그 후보자에게 그의his 남편 혹은 아내에 대해서 물어봐라.

(5)는 잘 모르겠음.. (6), 인간이라면(즉 젠더중립적) 아이에게 모유를 먹인다고 말할 때, 전적으로 여성을 지칭한다. (7)은 스스로 생각해보기.
언어가 정말 젠더중립적이라면 남자답다라는 말은 왜 칭찬인가? 여자같다라는 말은 왜 모욕적이게 쓰이는 경우가 있는가?
이 파트 뭔가 어렵게 느껴졌는데, 청소년사례를 생각해보면 될 듯. 젠더중립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남자를 말함. 여자는 지워짐. 보편으로 간주되고 예외로 취급되는 것에 대해 어렵게 얘기한 것으로 보임.

주체로서 지워지는 부분에 대해 관심이 많이 생김. 이 부분을 적극적으로 폭로하고 들춰내야할 것으로 느껴짐. 그런데 이미 지워져 있는거라서 쉽게 떠오르지가 않네..

- 기생적인 지칭. (이거 재미있었다)
거짓된 포함false inclusion 이라는 주제는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man'의 총칭적인 사용과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man의 어족에 관한 초기 페미니스트 연구에 나타나 있었다. 중립적인 'man'은 어떤 신화라고 주장하는 재니스 몰튼은, 기생적 지칭parasitic reference 이라는 개념을 언어적 성차별주의에 대한 철학적 논의에 도입했다. 몰튼은 모든 사람들을 지칭하기 위해 man'을 사용하는 것은, 표백제를 지칭하기 위해 크리넥스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대접을 받는 브랜드(크리넥스, 대일밴드, 스카치테이프, 활명수..?)들이 증가된 인지도를 얻게 되는 것(그로 말미암아 대표성과 경제적 이익을 얻게되는 것)과도 유사하다고 말한다.
그녀는 이같은 용어들의 메시지는 문제의 브랜드가 최고이거나 혹은 최소한 기준이라고 주장한다.  인간같은 용어들도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는 남성성이 규범이라는 메시지를 포함한다고 몰튼은 주장한다. 그 결과, 그것들을 마치젠더 중립인 것처럼 사용하는 것은 여성들에 대한 일종의 상징적인 모욕이 된다는 것이다.
몰튼의 돌파구는 그런 상품명을 통칭적인 것으로 제기하는 규범적인 편향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도입하는 것이었다(대일밴드는 상표명일 뿐이야!). 비록 그것들이 통칭적인 것이 되었다 하더라도, 브랜드 명이라는 이익이 여전히 붙어있다. 즉 그 브랜드가 규범을 설정한다(상처에 붙이는 그 대일밴드, 말고 대일밴드 같은거!). 이와 유사하게 남성들은 일반 계급에 대한 규범-인간성-을 설정한다. 이를 통해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공유한다.
양성평등이라는 단어 역시 일종의 기생적 지칭이지 않을까?

만일 정말로 말이 그 같은 형이상학적이고 인식론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어째서 여성에 대한 말들이 그렇게 비하적인 경향이 있는가를 시급하게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게 된다. 코스마이어는 보다 중립적인 언어로 변화하는 그런 희망(그러나 보장은 없는) 허울뿐인 결과 이상을 가져야한다고 제언한다. 그러나 의미론적인 비하를 종식시키는 것은 어떠한 효과를 가질 것인가? 드워킨의 말을 바꿔 말하자면, 어쩌면 말을 위한 광장을 만들어냄을 통해서 여성들은 생존과 행복을 보장하는데 필수적인 권력을 획득할 것이다.

Q&A 및 생각거리

Q. 남녀, 부모.. 여성이 뒤에 오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엄마아빠는 이상하게 익숙하다. 이 이유는 무엇이며, 만약 누군가 그냥 그때그때 다른 것이고, 어떤 이유를 찾더라도 그건 자의적 해석일 뿐이야라고 말한다면? 즉 어떤 언어가 순서에 의해 차별적이라고 평가받을 때 그 평가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누가 판단하는가?
A. 이는 분명히 표시 지움의 긴장에 놓여있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여성이 대상으로 표시된 것이 엄마아빠이며, 주체로서 지워진게 부모이지 않을까. 엄마아빠라고 할 때의 엄마는 내게 엄마적 역할을 하는 존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누군가 물어본다면 역시나 맥락에 의존해서 해석하는 수밖에 없겠다. 사실 그렇게 불리는 이유야 여러 가지일 수도.. 발음상의 편의도 있을 수 있고.. (다른분 대답해주심) 엄마아빠는 가정 내 양육적 언어이며, 극히 한정된 영역에서 쓰인다. 반면 부모는 사회적 언어이며 official하다. 위치차이가 분명히 존재.

Q. 본문이 약간 외국어 중심적으로 느껴지는데, 한국어는 사실 용언중심적이다. 주어가 없어도 되는 경우도 많다. 표시되고 지워지는 한국적 사례가 있을까?
A. 인칭대명사 그/그녀는 여전히 남는다. 모든 그녀 로 단순히 치환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 왜냐하면 여성의 입장, 특수성을 가리는 결과가 나타날 수 있음. (다른 분 대답) 분명히 한국 용언들도 젠더중립적이지 않다고 생각함. 형용사같은 경우는 명백하며(잘생겼다), 잘은 모르겠지만 동사 역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함. 한국어적 배경에서도 젠더중립적일 수 없음. 어미로도, 조사로도, 글의 분위기에서도 젠더 드러남. - 했습니까? 했냐? 했어요? 했나요?,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등등..

Q. 어떤 언어도 가치중립적일 수 없다면, 결국 어떻게 언어생활 하는가?
A. 이는 3~4강에서 다룰 주제. 간단히 얘기하자면, 개별 언어 각각에 주목하는 건 의미 없다고 주장하는 분이 계시다.
이에 대해서는 어떤 언어가 꽤 중립적인가 나아가서 자체로 중립적일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떤 맥락에서의 중립을 말하는 것인가(평화는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유아인의 평화!! 싸우지마!! 는 중립적이지 않다) 등등에 따라 입장이 다 달라진다. 표시되는 부분에 집중하는 분도 계시고, 지워지는 부분에 집중하는 분도 있다.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시는 분도 계시고, 기존 언어의 문제점을 폭로하는 분도 계시다. 관심사에 따라 입장이 다 다르다.

Q. 단순히 수가 많아서(간호사 여자 더 많음 - 남간호사, 의사 남자 더 많음 - 여의사) 라고 따지면 뭐라 대답해야 할까요?
A. 첫째로, 원인으로 제기된 수가 많아서에 대해 반례를 제기할 수 있음. 만약 반반이거나, 혹은 오히려 수가 적은 경우에도 가 붙는 경우를 말해줄 수 있겠음(초등교사 여교사, 이혼녀/미혼모 - 미혼모면 당연히 미혼부 있을텐데, 미혼모만 표시된다)
둘째로, 사례로 제시된 간호사 의사의 위치차이도 고려해볼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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