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7일 토요일

다시, 바로, 함께, 한국미술 공개세미나 V / 2000년대 : 미술현장으로서의 세계




다시바로함께한국미술 공개세미나 V
2000년대 : 미술현장으로서의 세계

2019. 7. 27. 토 14:00-17:30
이음센터 이음홀(5F)
문화체육관광부예술경영지원센터 주관

1부 (현재페이지)

(2:00-3:30 사이 앞부분 내용 본글에 포함되지 않음)





김홍석     독일에서 유학하던 당시 아시아성, 한국적인 것을 보여달라는 요청을 받았었다. 독일의 미술가들은 ‘나는 왜 요즘에 하얀색이 좋지?’ 그걸 주제로 작업을 해보자 하는 식이었는데 아시아 남자로서 독일에서 공부하면 한국스러운 작품을 가져오게 하는 요구사항이 있었던 것이다. 그 아이덴티티를 표현하라고 하니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일본의 작품들에 대해서 현대적 일본식 스타일이 유행했기 때문에 억지로 생각해내야했다. 무언가를 만들어 내면 독일적이다, 서구식이다 하는 피드백을 듣곤 했다.    그 상황에서 작업을 하는 것이 자유롭지 않아서 서구에서 공부하는 것이 어려운 점이 있었다. 오히려 한국적인 것을 내세우는 것이 싫었고 내가 관심있던 것들을 하고 싶었다. 당시에 공동작업을 했던 사람이 물질성이 없거나 비물질적인 것, 무장소성에 관한 작업을 많이 했었다.   
번역의 문제 - 근대화 과정에서 경제 정치 교육을 번역하여 koreanized 된것을 기반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고 있음. 우리만의 새롭고 독특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본성 중에는 흉내내는 것도 있지만 나만의 것을 갖고 싶다는 욕구도 있다. 그래서 후자쪽에서도 관심을 가질 필요 있지 않을까 싶다.

이주요    나는 나라들을 옮겨다니며 작업했다. 한국은 부모님의 나라이고 부모님의 규칙은 무시하기 어렵다. NL에 가서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는 것은 한국에서 듣는 규칙을 무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다. 여기(한국)에서 살아가려면 체화된 채로 질문하지 않고 살아가야한다. 그러나 나는 환기되는 것, 질문하는 것을 원했다. 그래서 어떤 장소에서 익숙함이 느껴지거나 사람들이 친숙해지면 떠났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돌아다니면서 아티스트 지원 프로그램 등을 찾아다녔다. 중요한 메이저 집단 들에서 막내였는데 메이저 작가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역할 수행을 한 것임. 그래서인지 기회가 많이 왔다.  

세계화. 어려움들을 개인적으로 -기록을 통해서-극복하려고 했다. 그러나 80년대 한국에서의 삶을 어렸지만, 견딜 수 없어 했던 것은 결국 세계화에 준비된 사람이었기 때문아닌가 하는 생각. 지금 이 상태를 견딜 수 없어 어딘가로 가야하는 것, 여기가 아니라는 것, 거기서 굴러 체득하고 다른 상태에 놓였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지금 펼쳐진 현장에선 역할이 주어졌던 것 같다.


    언니오빠들-을 쫓아다니던 하녀(본인)는 많은 구경을 하고 다녔다. 그렇게 구경하면서 알게 된 것이 많았다 학교교육보다 현장을 굴러다니며 느낀 것들이 많았다. 그때 당시에 선배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 사람들이 나의 선배, 이걸 헤쳐나가고 문제를 테이블에 올려 풀어준 사람들을 선배로 삼았다.    (한국을 생각해보면) 내 자식이 여기서 살아도 될까, 내가 여기서 늙어도 될까, 사회 시스템과 아트 월드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한다.


    그동안 나에 대한 크리틱은 저게 예술이야? 가 대부분이었다. 그냥 전시를 해서 벽에 거는게 기쁘면 되는데 (나는 그게 동의가 안되었고) 동의가 안되는 것을 하는게 용납이 안되었던 것 같다. 벽에 걸려있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1초만에 지나가는거 말고, 무게가 있어서 집에 들고 가서, 원해서 샀을 테니 집에서 넘겨볼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싶었다.   




유진상    나는 화가였다. 작품을 전시했는데 전시를 네덜란드에서 해주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10점 넘게 작품을 도둑맞고 나니 그림을 그리기가 싫어졌다.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는 교편을 잡았다. 90년대 초에는 미국, 영국 미술시장이 무너졌고 94년도 기점으로 한국에서 페인팅도 무너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는 페인팅을 하면 바보였다. 사진이나 팔지 않아도되는 그런 작품들이 주류가 되었다. 공공기금으로 만들어지는 것들이 주류가 되므로 80년대에는 갤러리스트가 이끌어가던 시대와 달리 90년대 들어서 큐레이터로 문화 권력이 넘어갔다. 그때 당시에 큐레이터는 공부하던 사람들이었고 좌파적, 공공성, 막시즘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큐레이터로 직업을 전환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비엔날레가 시작하고 난 다음에 본격적으로 큐레이터 시대가 되었다.


     당시 평론 글을 써보라고 하니까 오히려 작업하는 것 보다 더 관심을 기울여 주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글을 썼고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학생들이 작업을 해야하면 어떻게 해야되냐고 질문을 했는데, 작업의 주제나 개념적인 것들을 주로 이야기하던 수업이었기 때문에 작업을 어떻게 해야되냐고 물어보면 애들한테 다 알려줬다. 그럼 애들이 다 그걸 가지고 작업을 한다. 그러면 또 작업이 하기 싫어진다. 그래서 그때 그때 다 이야기를 하고 나니 직접 작업은 안하게 되더라 (웃음)    그래서 글을 쓰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평론가가 되었다. 그래서 정현 선생니과 같이 정석적인 평론가가 되었던 것이 아니라 빈 곳이 많은 평론가다.


    90년대 말미부터 공장미술제가 시작되었는데, 유명 대학 출신이 아닌 학생들은 졸업하면 무엇을 해야하나, 당시 학생들을 가르치던 와중에 고민이 많이 되었다. 그래서 몇몇이 모여서 연합전을 해보자고 했다(공장미술제). 그전까지는 대학들 간 교류가 없었다 교육부에서 하는 교육대전이 있었는데 이건 관제행사라서 학생들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공장미술제에서는 큐레이팅을 했다. 세 명이서 움직였는데, 이영철, 홍명섭, 임용익 (피드백요망) 저, 이렇게 같이 움직이는데 갑자기 이대에서 하겠다고도 하고 서울대도 하겠다고 하는 식으로 다른 학교 학생들도 함께 하게 되었다.    그래서 12개 학교가 되었다. 그래서 이천에 양말 공장 가서 전시를 했고 꽤 잘되었다. 거기서 나온 작가들이 지금 40대 저명한 작가들인데, 거기서 첫 전시를 많이 했다.


     그 다음해에 또 전시를 했을 때에는 이미 미술대학 교육을 통해서 익히 관행적으로 알려져 있는 작업방식을 지양하고 뻔한 것을 하지 말자, 그리고 완전히 해외에 내놔도 괜찮을 정도의 작업을 업그레이드 하자는 생각으로 큐레이팅을 했다. 작가가 120명이었는데 석달 동안 집중적으로 한 작가당 3-4시간씩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작업을 좀 만들어서 전시를 했다.


    아트마켓 시장규모로 치면 우리나라는 (전세계) 0.3프로고, 90프로 이상이 Hans Ulrich Obrist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로 대표되는 엘리트그룹이 움직이는 통합된 세계 미술계가 있고, 그당시에, 그리고 시장도 거의 통합된 상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학생들을 가르쳐서 해외에 내보내는 것이 시급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컨텐츠가 괜찮아야 하는데 대부분의 대학원생들, 대학 갓 졸업한 사람들이 작업은 뻔한 것이었다.


    요즘은 세대 교체가 많이 되었기 때문에 모르겠지만, 당시만 해도 대학생들 사이에서 서로 교류도 없었다. 소수 대학에 이목이 집중되는 경향도 컸다. 그런데 공장예술제 하고 나니 예전에는 조명받지 못하던 학교들에 그 학생들이 두각을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로 네트워킹 하고 서로 이름들을 꿰뚫으면서 자기들이 지금 어떤 판도에서 작업을 하는지를 알게 되었던 사건, 이것이 흥미로웠다.     사실은 오늘 주제가 해외이다 보니까 (하는 말인데), 한국에서 작가로서 국제적인 활동을 하게 되는 방법은 두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굉장히 영어를 잘해서 네이티브 수준이라서 굉장히 네트워킹 잘하고 전시 참여하면서 커리어를 굉장히 인싸스럽게 쌓아나가는 방법이 있고, 다른 방법은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영어 못해도, 작업실에서 약간 이상한 애가 갑자기 작업을 해가지고 가져오는 것. 아싸인데 거기서 혼자 작업을 해서 재밌는걸 들고 오는 방법도 있다. 그래서 갑자기 해외로 나가기도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한지인 (피드백요망) 이라는 작가가 있는데, 경원대 출신인데 대학교 2학년때부터 두각을 나타내서 삼학년때인가 즈음에 주요 베뉴에서 전시하고 졸업하자마자 광주비엔날레 간 친구가 있다. 그런 식의 케이스가 있다. 근데 그건 굉장히 드물다.


    그래서 그런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현대미술 아무리 얘기 해봤자 좋은 작가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실질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토양이 있어야 한다. 한국은 좋은 면일 수도 안좋은 면일 수도 있으나 모든 이슈들이 한 방향으로 수렴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미술판도 그렇고 어떤 이야기가 비평계에서 나오기 시작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 방향으로 이야기를 한다. 한방향으로만. 그러다보면 젊은 작가들은 거기로 쏠리게 된다 나중에 결과적으로는 한쪽에만 사람이 있고 나머지 공간은 텅 비게 된다.


    미국-서구-은 공간을 듬성듬성 채우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빈 공간이 너무 많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저 같은 사람은 대학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제가 아카데믹하게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운동권 출신도 아니므로 특별히 소속된 그룹도 없다. 지나고 보니 혼자서 항상 어디서 뭔가 남게 되더라. 그래서 드는 생각은 작가들로 하여금 스스로 그냥 자기가 하고싶은 것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는 커리어 욕심도 없어지고 그러다 보니까 아시아 같은 행사도 주관하게 되었다. 예술계가 싫어할 만한 일이었다. ‘애들에게 돈 맛을 왜 들이냐’는 피드백도 있었다. 애들이 졸업하면 뾰족히 할 게 없고, 지방 전국에 페인팅 하고 있는 애들이 많은데 그럼 그 애들 졸업하면 어떻게 하냐, 누가 케어를 해주냐 이런 생각을 했었다. 대학미술혀의회가 있는데 가서 보면 선생님들이 반응은 반으로 나뉜다 유명대학은 하지 말자는 쪽의 의견이었다.


    텔레비전 리얼리티쇼도 있었는데, ‘기업들에 애들을 놀아나게 하지 말라’고 말리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왠지 하지 말라고 하면 하고 싶어져서 나는 했다(웃음).


    지금은 우리나라 미술계는 실용주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 되었다. 시장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많이 하고 특히 테크놀로지 관련된 이야기도 많이 하게 된다. 축구에 비유하자면 공이 한쪽에 굴러가면 모든 플레이어가 한쪽으로 가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못하는 축구다. 빈공간을 메워야겠다 하는 생각을 한다.  





<김장언(진행) : 지금까지는 세계화의 충격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베를린 장벽 넘어지고 국경 넘는 것이 가벼워지면서 오히려 뿌리를 내리는 것에 대한 부담이 생기면서 새로운 세계에 대해 마주하는 것, 새로운 작업방식등을 모색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한국 미술계가 해방 이후 차곡차곡 쌓아온 지역적 시스템이 세계화 충격으로 어떻게 와해되었고 어떻게 다양성이 확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도 저변에 깔려있다.>


장승연 질문 : 김홍석 선생님의 2007년 작업, 국가라는 경계를 유머러스하게 비판하던 프로젝트가 기억나는데 다른 협업 작가들을 만나게 된 것도 환타지아 언더컨스트럭션 전시에서 당시 아시아 현대 작가들을 만났다 라는 인터뷰를 하신 것을 보았다. 이런 프로젝트도 새로운 시도를 글로벌리즘의 영향을 받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김홍석 : 정확히는 2007년 시작이 되었으나 2006년 미술관에서 개별로 초청을 받았고, 협업작가들은 칸톤도쿄라는 이름으로 듀엣으로 참여한 것인데, 세 사람이 다 오래 전 부터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쉽게 세 사람이 결성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만나기가 쉽게 된 것은, 작가가 많은데, 일종의 유랑 극단 같은 의미로 어느 나라 대표로서 만나게 되었던거 아닐까 싶다.

 약간 다른 길로 빠지자면 전시라는 것을 90년대에는 작가라는 작품보다 작가들이 전시를 이해하는 시즌이었던 것 같다. 전시라는 것은 기존의 미술관이 기획하던 것인데 그 이후 전시 형태가 다양히 생겨나면서 대안 공간도 생겨나고, 비엔날레도 있고, 다양한 정체불명 전시가 생기다 보니까 내 작품이 아틀리에 떠나서 여기 설치되는 것이 의미가 뭔가에 대한 고리타분한 생각은 끝나고 오히려 전시 사이클을 공부하는 적극적인 작가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전시가 생겨나니까 그 다음에 작가들이 그런 변신을 했다. 그래서 당시에 유랑극단처럼 초대받으면 거기에 갔던거고, 한중일 작가로서 만나면 서로 미술에 대한 개념 차가 있었다.


 그래서 전시개념으로 만나지 말고 우리가 작품으로 만나보자하는 프로젝트였다.


    두번째로는 절대 우리가 한중일 하면 떠오르는 그런 이미지는 연루시키지 말자는 생각을 했다. 프로젝트성 작품을 하자, 선입견을 가지는 것도 한중일 어떤 것도 언급하지말자고 했다.  언어도 잘 안되서 소통도 문제였으나 상당히 나이가 든 상태였기 때문에 마음이 편했었다. 큐레이터가 제안을 했다. 이번에는 콜라보 하면 어때? 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그 날로 만들었다.    한명은 북경, 한명은 동경 그러면 서울은 뭐냐 서경인가(웃음) 근데 서울은 서경은 아니다. 그래도 서경을 중국식 발음으로 하면 멋있겠다 생각해서 만장일치로 그 이름을 정했다. 그 이후에 기약없이 약속을 하고 난 다음에 다시 언급하고 몇개월 뒤에 초청을 받아 부랴부랴 작업을 했다.


    마무리하자면 동 프로젝트는 정치적 역사적 의미를 배제한다는 의미로 시작했던 것임.  


1부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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