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7일 토요일

2000년대 : 미술현장으로서의 세계 (2부)


다시바로함께한국미술 공개세미나 V

2000년대 : 미술현장으로서의 세계

2019. 7. 27. 토 14:00-17:30
이음센터 이음홀(5F)
문화체육관광부예술경영지원센터 주관

1부 (클릭시 새창)
2부 (현재페이지)

(2:00-3:30 사이 앞부분 내용 본글에 포함되지 않음)


2부 라운드테이블



정현

미디어 비엔날레 에 관하여 질문최근에 보면 우리가 생각하던 그런 전형적인 미디어와는 사뭇 다르다 올해 들어서 인터넷 웹아트 탄생20주년 기념으로 해서 관련 전시가 많았는데그 얘기를 하면 어떨까 싶다디지털을 세계화에 접근할 수 있는 진입로로 삼은 것 같다

유진상

2000년대에 송미숙 선생이 미디어 시티에 전시를 했을 때 예산이 백억 넘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정부 지원을 받아서 그 큰 규모를 지원받아 열면서 김대중 정부의 IT 지원 정책 방향이었기 때문에 당시는 그렇게 되는게 당연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최근 미디어시티서울은 제가 한 다음 박창경 백지숙 그다음 컬렉티브로 이어졌는데나라 자체는 미디어 테크놀로지면에서 굉장히 앞선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 그것에 관심을 갖고 그 기술을 기반하여 창작을 하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적다상대적으로 일본의 경우 특유의 오타쿠 문화떄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오래전부터 일렉트릭 일렉트로닉 인포마티브 툴을 사용한 작업들이 굉장히 저변이 깊게 자리잡혀있다일본 문무성 홈페이지 보면 정부 문화정책을 시행할때 미디어를 떼어놓고 지원한다지원 규모가 크다는 것이다.

미디어시티 서울은 국내 유일하게 기술기반 예술을 부흥시키는 플랫폼이었고 거기에 우리 국내에 인터네셔널 비엔날레가 있는데광주비엔날레와 부산비엔날레는 같은 컨텐츠다 같은 네트워크 안의 큐레이터를 초빙해서 각국의 국가대표를 불러서 전시를 하는 그런 성질의 전시들이다국내 작가들의 경우는 광주에서 전시했다가 부산에 갔다가 하고 있다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그 자체만으로 굉장히 공급이 넘친다그런데 미디어시티마저도 똑같이 한다면 조그만 나라에서 같은걸 너무 많이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그래서 조금 다변화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가지고 미디어시티 서울은 출발점에 다뤘던 것 과 같이 기술기반 창작 이슈들을 전 사회적 전 시대적 차원에서 조망해보는 플랫폼이 되었으면 한다는 생각을 했다.

제 앞에 김선정씨가 했는데 그때 다시 소셜 이슈로 가서 일반 비엔날레처럼 되었길래 저는 다시 기술기반 전시로 돌아가자고 해서 소위 소셜미디어 관련한 전시를 만들었다그 다음해에 다시 소셜한 이슈의 비엔날레로 진행해서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거기에 대해서 제가 판단할 입장은 안되지만 조금 너무 집중되는 것이 좋지 않게 생각하는 입장이라서 다변화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정현

생태계에 관심을 많이 갖고 이야기를 하시는데 한국 미술계가90년대-2000년대 초반까지 모든 미술 잡지나 미술 정책이 전국의 균형발전이 빠진적이 없었다그런데도 불구하고 서울로 초 집중되는 현상은 마치 학벌 사회처럼 계속 반복되는 것 그런 풀리지 않는 괴리 같은것들이고 미술계에서도 여전히 비슷한 현상이 초래되는 것 같은데 선생님은 그렇다면 우리 같은 작가 큐레이터 비평가 교육자들이 실천해야하는 고민이 있다는 것인데 혹시2000년대 초반에 공장 예술제처럼 (그것들을 해결하기 위한그런 시도가 있는지 궁금하다


이주요

한쪽으로 집중된 활동이 그 요건이 무엇일까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질문이 있다.

유진상

저는 제가386-지금은586이 되었지만-세대이다저는 저희 세대가 문제인 것 같다한 세대 전체가 동일하게 경험한 기억을 가지고 그 세대가 지금 주류가 되었는데그러면 당연히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여러분은 그 물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한 세대 전체가 거의 백퍼센트 가까이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슈가 한군데로 모이는 것은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다만 그런데도 그게 하나의 국가사회이기 때문에 그 안에는 다른 것들을 빈공간으로 달려가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너무  모든 것들을 장악하려는 욕망은 이해하지만 빈공간을 고려해야한다그렇게 생각한다.

진행자(김장언) : 미디어시티 관련하여서 집중된 것들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다른 질문의 한 포인트는 세계화와 관련되어 미디어의 변형같은 것들이 어떤 여향을 미쳤느냐에 관한 질문이기도 했다소통이 매우 가벼워지고 세계를 경험하는 툴이 달라졌다

유진상

93년도부터 피시통신을 하고95년 인터넷, 96년에 개인용 휴대폰 보급2000년대 중반부터 고속 통신이 보급되었다. 7-8년 안되는 사이에 통신 환경 급격히 변했다모든 사람들이 거의 인터넷에 접속 되어있고 싸이월드 시대이니까자기 계정에 대한 관념이 확실히 정착되어가던 시기이다그래서 저는 그때 하던 이야기가 이제는 인간을 정의할 계정으로서의 인간이라는 개념도 말했다지금의 인스타그램페이스북이 다 그런 계정들이다

저는 crosstalk크로스토크라는 전시를2002년에 했는데 그 전시는 문화예술진흥원에서 저한테1200만원을 주면서 문화회관1,2,층을 전부 메우라고 했다예산이 적어 그 넓은 면적을 채우기 곤란했다그런데 그 전에 제가 인터넷으로 라디오방송하던 것을 본적이 있다그래서 인터넷으로 그 티비 방속국을 만들어볼까 했다별 생각없이 했다아는 사람에게 물어봤더니 그때 벤처를 하는 사람이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기술을 제공할 테니 그러면Video on demand를 제공하자고 하는 것이다그래서 학교에 있는 장비들을 다 들고 나와서 구석에다 방송국을 차렸다그래서 회선을 끌고와서 동시에300명정도 접속 가능한회선으로 온라인 비디오 스트리밍 방송국을 만들었다컨셉은 간단하다어차피 (날씨가 춥기도 하고아무도 안보러올테니 카메라를40대정도 전시해놓고24시간cctv처럼 보여주자는 거였다그래서 전시장에 카메라를 달고 작품들을 이수경도 참여하고 여러 작가들이 참여했었다.

퍼포먼스를 하고 그때 밤에 평론가드들을 불러서 술을 마시고 술마시는걸 생방송으로 방송을 했다그게 되게 재미있었는데 그게 제가 미디어아트 큐레이터가 된 계기다



이주요: 90년대 초반부터 변화되는게 작가로서 그런 커뮤니케이션의 디지털화로 인해서 어떤 변화를 경험하였는지처음에2학년때 뉴욕을 간 시절나는 뉴욕을 갔는데 파이낸스가 강세인 좋은 학교라 부자들이 많았다유학생들도 돈이 많았다그런데 그 친구들도 인터네셔널한 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그 당시에 국제전화는 빨리 하고 끊어야 하는 시기였다그들 중엔 결혼에 골인하는 일도 있었다

작가활동을 하면서 저는 특이하게도 인터네셔널 전시를 할 때에는 어시스턴트로 따라갔다.당시에 업무는 팩스로 주고받았다처음에는 큰 도화지로 그리고그 다음에 에이포 크기로 줄여서 복사하고 다시 팩스를 보내고 한 시절이었다.

시간이 아주 멀어보이지만 그렇지가 않다팩스자료들이 굉장히 많이 아직도 남아있다그것을 위한 드로잉복사물들이 많이 있었다그러던 시절이었다그리고 저는 이제 오히려 되게 많은 비행기를 탔다한달에 두번씩 젯셋이라는몸으로 했기 떄문에 오히려 그런 것들을 미디어 영향을 많이 안받은 채로 살았다멀리 스페인에 있는 잡지와 화상 인터뷰를 해서 작업을 퍼블리시 했다가 그 에디터와는 전혀 만나보지도 못한 식의 방식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앞으로 미디어라는 것이 결국엔 우리가 그렇게 미술 관에서 결국 관객을 만나게 하면서 그 브리지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지 않을까그 노력에 주요한 파트는 쉽게 해주는거다어려운 것을 단순하고 납작히 만들어서 하나의 언어로 만들거나 생활에서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예술은 근데 그렇게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그래서 그 이상한 방식으로 오해의 말을 흉내를 내면서 그게 대중화다이게 오디언스를 더 많이 모을 수 있다고 생각을 했던 시절이 간 것 같다이제는 대중ㅇ 직접 컨택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하고 말도 안되는 소리라도 직접 떠든다어떤 것이 형성되는 것인지가 분명하다저는 더이상 미술이 뭔가 되게 놀이로서도문화로서도 자리를 잡고말할거리어디로 가서 놀러가자예쁘게 사진찍어 올리자 하는 문화로서 향유되는 것 같다.

진행커뮤니케이션 툴이 핵심이 되었다.

이주요전시가 권력의 관계가 있다거기에 어우러지는게 힘들었고 그걸 해내기에는 힘이 없었다전시 혐오감도 있고책을 팔고 모든걸 쏟아붓고 다음날 오면 다시 설명해야한다.

오브제에 대한 이야기를 가르쳐야겠다이 친구들이 물건에 대해서 조각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물에 대해서 사물이 커뮤니케이션 하는 어떤 식으로든 발현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열심히 수업을 해도 이 친구들은 다음에 보면 버린다

저는3개의 스토리지를 빼라고 런던 독일 서울에서 연락이 와있는데그게 해결이 안되었다태어나긴 했으나 과감하게 버릴 수 없어 한곳에 모아놨는데 갤러리가 나이가 들어서 이제 버리거나 하는 식의 일들이 일어난다제가 거기에서 시장성있는 작가가 되면 되는데 그렇게 못했고저는 바디 있는 활동 하라는 말을 잘 못한다너 그림그리는거 잘하는데 그거해라비디오 잘하면 비디오 해라하고 말한다이 친구들이 이걸 해나가면서 살아갈 수 없는데 이게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좌절감이 있다.

전시하고 난 다음에 버렸다는 것계속 이동하면서 작업의 생산 방식들결과물로 작업화시키는 것에 대한 것을 비물질화 시키거나 개념적인 툴로서만 유통시키는 그런 현상들도 한편으로는 당시 한국 작가들에게 많이 보여줬던폐기해야만 지속이 되는 것..


기혜경

박이소 작가를 언급하셨는데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고동시대 미술계에 엄청난 영향 미친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주요 선생님이 어시로 활동하던 중 옆에서 본 바 어땠는지또 작업을 대하는 태도라든가 그 세계관이라든가 그런것들이 미술계에 그 이후에 영향을 많이 미쳤다고 생각을 했는데옆에서 지켜보신 바 어떠셨는지 궁금하다.

이주요

박이소 선생님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거 싫어했다박이소씨라고 하는걸 좋아했고애들 같은 장난 좋아한 분이다 미디어에 관심이 진짜 많았다끊임없이 컴퓨터 안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혼자 문닫고거기에 대해서 아주 어떤 통찰력을 갖고 있었던게 분명한 것 같다계속 삶을 이어서 사셨으면 어땠을까 하는 질문의 저는3년에 한번씩 떠올린다.

제가 그때 어렸지만개발도상국 이슈나 압축성장이슈 등을 계속 작가 스스로 묶이는 것이 너무 싫어했다내가 시멘트 쓰는 것만으로 (개도국성장이슈 프레임으로 해석하는데나한테 왜 그런걸 해석을 느냐 하는걸 불쾌해했고역사가 흘러가고 거기에 대한 것에 많은 의견이 있었던 것 같다제가 거기에 되게 비켜나면서 강력한 특징으로어떤 개성으로 혼자 어떤 존재로 만들어내는 것에 대해서 관심 많으셨고 서포트를 많이 해줬다그분 아니었으면 제가 이걸 계속해도 되는지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외따로 떨어진 행동을 하고 있었으니까근데 선생님은 그걸 굉장히 중요하다고 했었다.

스스로도 그러존재가 되고싶어하셨던 것 같다내가 작가가 되서 중요한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좋은 작품혁명같은 작품을 꿈꿨던 것 같다가끔 앉아서 그런 말씀 하셨다내가 앉아있으면 너무 아이디어가 안 떠오르는데 하루만 미친듯이 작업 아이디어가 생각났으면 좋겠다는 열망을 느껴하셨다.내가 작업을 해서 어떻게 되어야겠다하는 거 보다 기상천외하고 어떤 것과도 비교 안되는 작업을 하고 싶어하던 것 같다.

진행박이서선생님은80년대에 세계를 경험하면서80년대에 한국의 시간뉴욕의 시간 차를 보면서 이 차이들에 극복하거나 개선하기 위해서 계속 노력들을 해왔던그게 태평양을 건너서 전시되고 한국으로90년대 넘어와서도 광주비엔날레등에 지속적 관여하면서 본인이 그러한 작가로 표상되기 보다는 한국의 현대미술의 세계화의 지칭 속에서 보이지않는 역할을 많이 했다그렇다면 이제 플로어로 질문을 넘기기전에
세계화로 나가는 것은 커리어 빌드업으로 생각하는 것 같고 지금의 한국 현대미술의 세계화라는 것과 연관시켜 본다고 한다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유진상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다예술의 원칙은 각자가 자기가 이 세계의 중심이 되냐 아니냐의 문제다나머지는 어떻게 보면 그 조건들과 관련된 부분이다그러니까 이동이라고 하는 것은 이동은 비행기값도 싸고 많이 갈수 있다그런데 그 이동이 자기가 원하는 것인지 잘 와닿지 않을때도 있다그렇게 하지 않고도 이동할 방법도 생겼다한 장소에 있으면서 굉장히 많은 이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이 많이 생겼다나는 해외에 자주 갈일이 있는데 그런데 나가는 이유는 저같은 경우에는 너무 어렸을때부터 이동을 했었기 때문에 습관이 되서 그런거같다지금은 좀 피곤하고 지겨운데 가게 된다세계화라는 것도 개개인들에게 요구되는 개념이 아니고 정책을 하는 사람이나 비평을 하는 사람들이나 비평가들도 많이 이동을 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각자가 자기 있는 곳에서 중심이 되는 방법을 찾는 것그게 진짜 테크놀로지다자기 머릿속에서 알고리즘을 생각해낼 수 있으면 되는 거다.

정책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나라의 위상이나 미술계의 정량적인 지표라던가 미술계가 어떻게 되는지중국에 어마어마한 미술관이 텅텅 비었다 하는 말이 오가는데 저는 그런생각이 든다정책하는 사람들이 제일 필요한 건 콘텐츠다 그게 나오려면 작가가 있어야 하고,작가가 나오려면 작가가 개인이 되어야 하는데 개인이 되기 힘들면 작가가 될 수 없다

저는 누구든지 다 스스로 자기가 원하는게 뭔지 분명해지고 그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한다거기에 대해서 누구한테도 조언을 듣거나 설명을 들을 필요가 없다원하는게 분명하다면
그런식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삶을 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세계화가 되었는데 그 세계화의 목적은 이 세계에 그런식으로 살아온 개인들의 사례들이 참 많다는 것을 접하게되는 것이다더 많이그 정도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거꾸로 말하면 자기가 있는 곳에서 예외적이 되면 된다.

이주요정주하는 삶이 아닌 유목이다국제 활동은 모국이 아닌 다른 국가나 모국으로 이뤄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돈이 있으면 조각들은 커진다조각들이 커진다돈이 있는 신체들만 커진다

우리가 이 신체성을 버릴 것인가 질감스케일의 감각이 모든 것에서 느껴지던 것들을 버릴건가친구를 사귀지 않을 것인가친구도 몸이다그런데 나는 나가서 활동을 했을때 그 다른 신체들이 저를 다시 불러줬다친구가 되었고 이건 어찌할 것인가싶다.

진행세계화는 다양성의 확대이기도 한데세계화라는 논의가 이뤄졌을때 그건 환상이고 더 가속화된다는 말을 하는 학자들도 있다동질성이 승리하는 세계가 올 것이기도 하다.

플로어

플로어 토론 1. 선생님들의 문제의식은 뭔가?

유진상축구장에 빈 데를 뛰어다닌다문제가 많다고 했다저는 대학교수이기 때문에 학생들이 졸업하고 난 다음에 어떻게 될 것인가가 너무 걱정된다교육부에서 하도 취업률을 중시하니 수업을 제대로 할 수 없다그런데 그건 하나의 변명 거리고 저는 젊은 작가들이 어디까지 목표를 둬야하는지가 문제라고 생각한다한국은 너무 제한적이고 너무 작고 좁다돈도 없고컬렉터도 없고 전문가도 많지 않다

그래서 저는 어떤 생각을 하냐면다들 좀 나가야 된다는 것이다한국에만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자기 모순적이런 섬에 살고 있는 상황에서는 나가야 된다방법이 문제가 된다제가 관심있는건 뭐냐면굉장히 잘하고 있는 상위 5% 이내의 엘리트 작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게 아니라 나머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그 작가들은 어떤 면에서는 컨벤션지방대페인팅만 해서 그 외의 것은 모르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그 사람들예술가로서 커리어를 쌓아가고 싶고 그림을 그리고 싶고 그러면서도 더 큰 목표를 두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확실히 좋은 갤러리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갤러리 세대교체를 생각해본다

왜 갤러리가 작가들과 성장하면서 같이 발전하면서 마켓을 만드러내면서 높은 안목과 수준을 유지하면서 그렇게 말하자면 하나의 생태계 안에서 선순환 시킬 수 있는 갤러리가 왜 없을까 싶다그건 제가 해결할 문제는 아니지만 충분히 그 이야기를 해볼 수는 있다철학적인 문제는 논외로 하고 실용적인 문제로 보자면 그렇다

이주요
갤러리라는 시스템 자체가 낡았을 수 있다미술은 발명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발명한 것 처럼 시스템도 미술계도 미술안에 있었던 컨텐츠도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진상

중국은 관제 네트워크를 통해서만 행사가이뤄지는데 일본은2000년대 초에 판타지아같은 전시로 전면에 나온 지금의 50대 중반 작가들이 상당수가 동경대의 국제 미술 학과라는 것이 새로 생기면서 그게 아베정부에서 만든 것인데 거기 교수로 들어갔다국가적 어떤 문화 프로파간다의 전문에 그 작가들이 포진된 것이다굉장히 이상하다.

반면 우리나라에서 굉장히 많은 교류를 하게 된 나라가 대만 인도네시아 레바논이다레바논은 특정 갤러리 소속 작가들인 뢀리드라나 아칸사타리 (피드백요망)등은 한국에서 보게 되면서 마치 중동미술을 그들이 몰고오는 것 처럼 본다시립미술관에 가을에 또 열린다아시아라고 하는 지도가 굉장히 플렉서블 해졌다

한중일이라는 프로젝트를 같은 것으로 다루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생겼다.방글라데시 다카같은 아트센터가 떠오른다이렇게 되면 얼터너티브한 지도를 그려봐도 되는거 아닌가당분간그래서 아시아에 대한 이야기를 할때 한중일을 만을 프레이밍 안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주요

 90년대 주도적인 큐레이터 비평가들은 한중일이 시스템을 가지고 있을때 왜 한국만 굉장히 독특한가 한국의 동시대성은 상당히 유러피언같은가 에 대한 질문을 여러차례 받았다그것이 유학갔다와서 갖고 들어온 케이스도 많겠지만한국이 여러 지적인 존재들이 사실은 그런 이야기들을 계속 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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