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28일 토요일

두번째 순간, 두번째. 시청률 54%의 외모품평쇼, 미스코리아 대회를지상파에서 퇴출시키다

두번째순간,
시청률 54%의 외모품평쇼, 미스코리아 대회를지상파에서 퇴출시키다
조정하 (전한국민우회미디어운동본부 사무처장)




조정하 : 안녕하세요 조정하라고 합니다

저는 19873월에 여성현우회 간사로 시작해서 87년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했고 2001년 미디어운동본부 사무국장 정책실장을 거쳐 상근활동가를 15년만에 끝내고 그뒤로 다시 15년이 흘러 민우회는 30돌이 되었다.

당시 상황을 간단히 말하면 미인대회의 전국적 범람, 방송의 성삼품화 가속화가 특징이었다. 요즘엔 너무 익히 주변에서 듣는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부터 21년 전에는 방송의 성상품화가 좀 낯선 용어였다. 시작은 1996년 총회를 마친 어느 겨울날이었다. 김경애 동덕여대 여성학 교수(당시)가 올해는 미스코리아 반대운동 어때? 하는 이야기를 했다. 1980년 미스유니버스 대회에 얽힌 이야기들을 말했었다.
광화문 광장에 장갑차. 전두환 지지군부와 장갑차들. 1980년도의 이야기였다. 이런 것이 당시 70-80년대 에게는 익숙한 풍경이다. 제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만 해도 흔히 말하는 짭새가 대학을 점령해있었기 때문이다. 80년대 초반만 해도 그랬다. 그런데 이제 그 같은해 7.7, 세종문화회관에서는 미스유니버스 선발대회가 열린다.. 그러니까 광주에서는 살육을 하고, 삼청교육대로 사회 공포분위기를 조장하던 전두환 정권이 미스 유니버스 선발대회를 하여 여성의 성을 상품화 하는 나름의 잔치를 광화문에서 퍼레이드를 하고, 기념우표를 제작하는 등의 사업을 해였다. 당시에 김경애 선생님 등이 자료수집 과정에서 알게되었다. 그때 저는 홍보부장이었고 알게된 우리는 분노하여 이슈를 검ㅁ토하였다.

당연히 초점은 3s 정책이었다. 빵과 써커스만 있으면 국민을 언제든지 내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했던 히틀러, 살라자르(포르투갈의 독재자,)3f 정책으로 futebol축구, Fatima종교, fado음악,
일제 1920년대 문화통치 조선인을 바보로 만들어라
전두환, 광주 학살 후 3s 본격 추진 : 80 미스 유니버스대회 유치, 81 아시안게임, 82 프로야구 출범, 83 프로축구, 83 프로씨름, 83 농구대잔치등, 에로물 등장
당시 통행금지가 해제되었고 흔히 하는 말로 밤문화를 막 양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때부터 성인물이 막 등장하게되고 이러한 환경을 아마 당시 문화장관이 허씨였던 기억이 나는데, 하여튼 이러한 것이 이슈 검토의 배경이었다.

이때 한번 세어보자, 했는데 미인대회가 최대한 개수를 세어보니 43개 정도였었다. 남한에 43개의 미인대회가 매년 치뤄졌기 때문에 정말 범람했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접근할까. 정면돌파는 보나마나 안될 것 같았다. 골머리를 앓았다. 자칫 하면 남녀 대립으로 하고 못생긴 여자들 늘 하는 그런 말이지 뭐, 하는 폄하를 당할 우려가 많이 있었다..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방송의 공공성에 주목하였다. 방송중계 중단을 통한 무력화에 주목하였다. 방송의 공공성에 주목하여 영향력 막강한 지상파가 미인대회를 외면한다면 어느곳에서 대회를 열든 그들만의 잔치로 끝낼 수 있다. 그러면우리가 기대한 효과는 거둘 수 있다 하는 논리를 만들었다.

운동으로는 토론회, 대학축제와 결합하여 온갖 대학에 많이 다녔다.. 대학 축제장마다 대자보를 붙였다. 미스코리아 방송 중단하라고 대자보를 많이 붙였다. , mbc노조와 협력을 많이 했다. 최문숙 노조위원장이 (현 강원도지사) 노사협상할때마다 이 문제를 다루게 한다던가, (진짜 했는지 모른지만 ㅋㅋ) 기고문활동도 많이 했다.. 미스코리아 주관사가 한국일보여서 언론노조가 태동하면서 관계가 좋았다. 그럼에도 동종 업계인 한국일보가 하는 사업에 대해서 조중동 등이 전혀 기사를 안쓰는 것이다. 이것이 미디어 운동의 한계라기 보다는 미디어 운동이 넘어야할 벽이 이부분이었다. 미디어에 대한 문제제기 했을 때 자기랑 동종업계에 있는 다른 미디어 문제점을 외면한 것이다. 아무리 논리가 타당하고 동의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중 조선일보 사설란에 제 기고문이 하나 실린 것이 있다.
항의시위도 있었다. 항의방문도 잉썼다. 지금은 웃자고 하는 이야기지만 항의시위 할때는 저희도 가장 머ㅅ진 사람을 앞으로 내세운다던가, 우린 다들 너무 아릅다운 여성이지만 우리는 반대한다 하는 식의 ㅋㅋ 물론 한계는 있지만..

그 결과
당시 그때 성공한 이슈파이팅으로 귀결되었다.
물론 제가 만나는 사람들 사이의 평가를 써놓았을 수는 있다. 제가 가는 곳곳마다 다 이이야기가 있었다. 한겨레 신문만이 유일하게 다뤄줬다. 다른 언론사는 다 외면했음에도 불구하.. 만약에 미스코리아 대회를 삼성이나 lg등이 주관했다면 아마 전폭적으로 언론사가 대서특필했을텐데방송사 공격은 시눔ㄴ사가 굉장히 좋아할 이슈인데 아무래도 한국일보라는 동종 언론사라는 벽이 좀 높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방송의 성삼품화이슈를 최초로 거론하였고, 1998년 미디어운동본부 설립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는 방송의 공적 책임이라는 것과 성상품화를 연결하는 생각을 잘 하지 못하였는데, 그때 당시에 언론 공정성 공공성 문제에 테마에 많이 결합하여 이슈로 끄집어 냈고 성공했던 것으로 평가하고 싶다.

2002년 중계 중단이 되었다.

사회자 : 사실 이떄 활동을 계기로 미디어 운동본부가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미디어 영향력이 너무 커진 시대다. 그래서 미디어에 여성주의적 개입을 하는 것도 너무나 중요해지고 있다. 민우회 부설 미디어운동본부에서는 계속 그러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렛미인을 폐지시키기도 했고, 여성 아이돌의 본분?을 다루는 파일럿 프로그램 정규 편성을 막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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